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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앤 May 23. 2023

친절을 베풀어준 고마운 아가씨

나를 지키는 친절함에 대해 생각하다.

도시를 느릿느릿 걸으며 구경하고 다녔다. 느린 도시에 와서 서두르거나 급한 건 어울리지 않는다. 이미 그들에게 진 상태다. 물론 빨리빨리의 도시에서 여유 부리듯 느린 것도 어울리진 않지만 그래도 그건 다른 이야기다. 시간을 자기의 것으로 만든 승리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소도시들이 모여 있는 이곳 시코쿠에 와서 좋았던 건 마음껏 느려도 좋다는 허용의 도시처럼 어딜 가나 여유로웠던 점이다.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듯 자주도 드나드는 히로메 시장이다. 고치시에는 이 히로메 시장이 있는 한 활기가 끊길 염려는 없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이런 류의 시장이 도시 곳곳에 많은데 유독 고치시의 히로메 시장은 사시사철 번창하니 그 이유가 뭘까? 가다랑어 타다키? 물론 그것도 큰 몫을 할 듯하지만 총체적인 다른 이유들이 궁금하다. 그곳에서 샀던 과일 봉지를 달랑달랑 들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러다 그만 과일봉지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일어난 일이다.


나이 오십오 세가 넘으면서, 여기서 오 세에 방점을 찍고 싶다. 나이 오십 세 때에도 나는 천둥벌거숭이처럼 찧고 까불었던 것 같으니 확실히 해두자. 오십오 세 즈음부터다. 스스로 다짐한 것이 있다. 그 어떤 것도, 모든 것을 서두르지 않으리라. 그저 천천히 천천히, 또 천천히 천천히. 캄다운 캄다운! 하리라.


하루에도 몇 번씩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는지 자꾸만 튀어나오려고 하는 고질적인 급함과 서두름이 기미를 보이려고 하면 내면의 나에게 나는 늘 타이른다.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하자. 여유 있게 차분하게! 이것이 생활의 지침이 되어버렸다. 하루에도 정말 몇 번씩 외치는지 모른다. 나를 다스리는 강렬한 내면의 구호 천천히가 습관으로 형성 중이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아니 무조건 서두르는 일이 없이 달라져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이번처럼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질 때가 아직도 있다. 건너고 있는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요즘은 전혀 그러지 않았는데 이 날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발을 빨리 움직이고 싶었다. 아마도 고치시의 깜빡거리는 신호가 후다닥 끝나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충분히 내가 횡단보도를 건너고도 남을 깜빡 거림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도 원래 신호등의 깜빡거림은 다급함이나 조급함을 부채질하는 경향이 있다.


하여튼, 서두르면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 일이 벌어지는지 몰라. 횡단보도를 다 건너와 보니 손에 쥐고 있던 비닐봉지가 없다. 당황하며 뒤를 돌아보니 횡단보도 반대편 초입에 떨어져 있다. 다시 주우러 당장 가야 하나 아니면 다음 신호를 기다려야 하나 망설이며 주춤했다. 그런데 그 횡단보도를 중간쯤 건너오던 아가씨들 중 한 명이 나와 눈이 마주쳤다. 곧장 나의 상황을 감지한 것은 자신이 횡단보도를 지나오며 나의 비닐봉지를 보았던 모양이다.


그러더니 갑자기 뒤로 돌아 뛰어간다. 그리곤 나의 비닐봉지를 주워서 들고 나에게로 달려온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상당히 당황했다. 도와주어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컸지만 한편으론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지 않을까 그것이 더 조마조마했다. 결국 그 아가씨는 횡단보도를 미쳐 건너기 전에 빨간 불이 켜지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히 무사히 건너왔다. 나에게 비닐봉지를 건네주는데 만감이 교차한다.


활짝 웃는 얼굴로 감사인사를 몇 번이나 했다. 그런데 그 아가씨가 오히려 더 공손하다. 참으로 귀여운 아가씨일세. 그 아가씨는 자신에게 주어진 횡단보도 신호등 사용권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그런 걸 생각해서 행동하기보다 그저 본능적으로 몸에 배어 행동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그런 걸 보면서 생각한다. 저런 친절은 어려서부터 길러져서일까 아니면 태생적으로 몸에 배어있어서일까. 분명 그녀에게도 신호등은 깜빡 거림이었고 그것은 곧 끝나가고 있음을 의미했다. 그런데도 그런 행동을 했다. 그녀의 상황 판단력과 민첩성 그리고 친절함이 그저 놀라울 뿐이지만 나는 한편으론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세상의 많은 친절함엔 그 뒤에 숨어서 따라다니는 어둠의 위험인자들이 많이 있다. 무슨 말이냐면 기껏 친절하려고 했던 행동이 되려 자신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말한다. 나도 상당히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앞 뒤 가리지 않고 그저 남을 위한 친절함에만 방점만을 두어 행동했을 때 오히려 내가 손해를 보거나 해를 당하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다 보니 나의 친절함은 오지랖퍼의 괜한 짓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걱정시키는 쓸데없는 행동으로 전락되는 경우도 많았다.


암에 걸려 상황이 무척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던 사람이 자신의 고양이에 대해 쓴 글을 읽고 아연실색한 적이 있다. 길고양이들을 외면하지 못해 몇 마리나 데려다 키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암환자인 사람이 말이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고양이에겐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론 자기 자신에게는 가장 불친절하고 나쁜 사람인 것이다.


나도 저런 성향이 농후했기 때문에 이걸 깨달은 뒤론 쉽게 친절하려고 하는 것에 일단은 경계를 한다. 상황을 잘 판단하여 친절함을 베풀 수 있으면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하는 것이고 조금이라도 내가 힘든 상황이 될 것 같으면 이젠 시작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할 수 있거나 하고 싶어서 베푼 뒤에 벌어지는 일은 전혀 신경 쓰지 않으려 한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기가 막혀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나는 일화가 하나 있다. 언젠가 지하철을 타고 갈 때였다.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의 몸에 큰 벌레가 붙어 슬금슬금 기어가고 있었다. 그걸 왜 또 나는 잘 봐가지고. 그 남자에게 벌레 있는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벌레가 붙어있어요라고 말해주었다. 그랬더니 여타부타 아무런 말도 없던 남자는 벌레를 손으로 잡아서 떼어냈다. 그리고는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지하철 바닥 중간에 던져 놓는다.


그 모습은 마치 아군인 줄 알고 위험한 상황을 피하게 만들어 주었더니 되려 적군이 되어 그 위험을 나를 향해 공격하는 것 같았다. 아연실색했다. 지하철 문이 열렸을 때 밖으로 버리면 되었을 텐데. 설마 생명이라 죽일 수 없어서? 나는 내가 아닌 타인의 세상에 대해 나처럼 생각하는 그 몹쓸 오류 때문에 받은 상처가 태산만큼 많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친절이나 베풂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며 행동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저 아가씨의 경우도 횡단보도를 다 지나오기 전에 이미 빨간 불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 위험을 그녀는 감수한 것이다. 좋게 끝났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남았지만 만약 좋지 않게 끝났다면 결국 그녀의 친절은 친절이 아니게 되었을 수도 있다. 이러다 보니 온갖 세상 사람들은 친절함에 등을 자꾸 돌려버리려고 한다. 친절을 베풀지 말란 말이 절대 아니다. 똑똑한 친절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친절함이 되어야 한다. 나를 어떤 형태로든 얼만큼이던 헤치는 친절함은 친절함을 가장한 악마의 유혹이다.

 

그녀가 베풀어준 친절 한 봉지를 손에 쥐고 호텔로 가는데 길이 환하다. 그 여운은 오래 남아 나의 고치 여행을 더 풍요롭게 해 주었다. 아가씨는 복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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