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사모 단톡방이 활발히 운영되던 시절, '오늘의 긍정 메세지'로 매일 짧은 글을 올렸던 것이 바로 논어였습니다.
그 때는 논어의 깊은 의미보다 한 구절 한 구절 마음에 와닿는 내용이 많아 나누고 싶은 마음에 자판을 두드렸었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사람보다 가르치는 사람이 더 공부 된다는 말이 있던가요?
글을 쓰기 위해 책을 읽고, 필사하고, 오타가 나지 않았는지 한 번 더 읽어보면서 논어가 하나하나 몸에 스며들기 시작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직까지 한참 멀었지만 말이죠.
다시 한 번 논어를 들었을 때는 구절뿐만 아니라 공자의 삶까지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공자가 살았던 시대는 어떠했는지, 나이가 들어가면서 무엇을 하려 했는지, 제자를 왜 양육했으며,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살았는지 등 말이죠.
그렇게 삶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읽으니 조금 더 공자에게 가까워지는 듯 했습니다.
공자가 가장 중요시 여겨던 것은 仁(어질 인)과 學(배울 학)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질다'라는 말이 무엇인지 알듯알듯 모르는 아리송한 매력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답고, 마음이 넓고, 이해하고, 포용하고, 겸손하고, 용서하는 그런 사람이 떠오릅니다.
仁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느냐. 바로 모든 인간관계를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로 보면 됩니다.
한의사라면 부모님께 한약을 짓는다는 마음으로,
경호원이면 부모님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경찰이라면 부모님을 안전하게 모신다는 마음으로,
선생님이라면 부모님에게 감히 가르친다는 마음으로,
남편이라면 부모님을 모신다는 마음으로,
과일장수라면 부모님께 먹인다는 마음으로,
사장이라면 부모님께 대한다는 마음으로.
공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부모님을 잘 모시고 싶어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으므로 사람을 대할 때 孝를 근거로 대하라고 했습니다.
學而時習之不亦說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공자는 배움에서 인간의 이상을 바라봤습니다.
인간에게는 이상과 현실의 간격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이상과 현실의 간격을 신이 메워주리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신께 무언가를 이루게 해달라고, 갖게 해달라고, 성취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공자는 신 대신에 이상과 현실에는 간격이 있는데 그 간격을 메우는 방법은 배움에 있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논어의 맨 첫 단어가 學인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이 논어를 쓴 것이고 제자들이 바라본 스승님의 모습은 배움에 길을 두었다고 봤을 것입니다.
논어의 뜻대로 살아가는 건 어쩌면 21세기와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대로 산다고 천국에 가거나 돈을 많이 벌거나 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어가 많은 사람들의 지침서가 되는 이유는 논어처럼 살아가고 싶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또 논어처럼 살아가고 싶은 이유는 경쟁보다는 공생을 바라는 선한 마음이 깔려있기 때문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