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를 읽고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글쓰기의 네 가지 동기를 밝혔다. 그의 동기에 공감하며 추가로 생각나는 바를 정리해 보았다.
첫째는 순전한 이기심이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강력한 동기이다. 인정하고 공감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개인적인 야심이나 개인이라는 자각조차 버리는 게 보통이지만, 끝까지 자기의 삶을 살아보겠다는 재능있고 고집 있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는데 작가는 바로 이 부류란다. 내가 이 부류에 속할 수 있을까? 나는 재능은 아직 모르겠고 고집은 있는 것 같다. 남의 말은 그토록 안 듣고 신경을 거의 안 쓰면서 자신이 꽂힌 것에만 관심 있는 이기적 인간이란 말을 가까운 사람들에게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이런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남들 보고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치고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이다. 물론 입 밖으로 내서 말하진 않는다. 나에 대한 평가가 더 나빠지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모두 이기적인 동기에서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그럼 나는 문제가 없나? 아니다. 나는 가까운 상대를 잘 배려하는 정치적 행위가 부족하며 내 욕망에 남보다 더 솔직한 것이다. 나는 내 개인적인 야심을 버리는 것은 내 인생을 버리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에서 랜더링으로 만든 인간을 알아보듯,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사람들은 쉽게 알아본다. 하지만 내가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를 고민하면서 살기에 인생이 너무 짧다. 특히 남들에게 크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라면 더욱 더 그렇다.
둘째는 미학적 열정이다. 자신만의 문구나 표현, 메타포, 나만의 상징 들을 만들고 즐기는 묘미이다. 자신만의 문장의 리듬감이나 견고한 산문, 훌륭한 이야기의 전개에 따른 긴장감과 여운들을 보며 기쁨을 느끼는 일들을 포함한다. 하루키는 첫 작품에서 자신만의 문장을 쓰기 위해 먼저 영어로 쓴 후 이를 다시 일본어로 번역했다고 한다. 자신만의 문장과 스토리를 만들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 나는 대학 시절 프로그래머를 직업으로 갖기로 하면서 나만의 작품을 만든다는 점에 매료되었다. 물론 프로그램 코드 맨 앞에 내 이름을 넣을 수 있다는 명예욕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회사에서 프로그래머가 돼보니 프로그래밍은 작가라기보다 편집인이었다. 오자나 탈자를 찾아내고 논리에 맞지 않는 부분을 고치는 것이다. 물론 때로는 새로운 챕터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내 창작물이라기보다는 디자이너가 그려온 창작물을 그대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누군가 줄거리를 다 짜오면 그게 그 줄거리대로 잘 움직이도록 만드는 게 내 일이었다. 좋게 봐도 나의 작품이라기보다는 협업의 결과다. 나는 나만의 질서 나만의 미학을 온전히 나 혼자서 만들고 싶어서 글이 쓰고 싶은 것이다.
셋째는 역사적 충동이다. 사물의 진실을 후세를 위해 보존하고 싶은 욕구이다. 나에게는 나의 life log를 저장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삼촌이 할머니를 추억하는 영상을 만든 적이 있다. 나는 그 영상을 보면서 슬펐다. 생전의 할머니가 그리워서 슬펐다기보다는 거기 담긴 할머니의 모습이 실재 할머니를 대변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서이다. 제대로 된 삶의 기록을 남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봐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에는 미래의 AR 기술을 통해 돌아가신 사람을 진짜처럼 복원해서 대화하면서 실재 그 사람과 비슷하게 만들어 가면서 위안을 받는다. 영화 <스트레인지 데이즈>를 보면 머리에 쓰는 기기를 통해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모두 저장할 수 있는 기기가 나온다. 이렇게 나만의 경험을 사라지지 않도록 하고 싶다. 우리의 기억이란 얼마나 불완전한가? 우리의 기억은 초기의 경험을 되살리지 못한다. 계속 마지막으로 기억한 기억을 떠올리므로 마치 성능이 나쁜 복사기로 기억하듯 점점 불완전하고 달라지고 점점 희미해진다. 지금 기술 수준으로는 그리고 사진 외에 어떤 더 자세한 내용을 위해서는 글로 남기는 방법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글로 남기는 것도 결국 영원하다기보다는 순간적이고 사라지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최소한 나의 역사를 스스로 정리할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남기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일기를 쓰고 사진을 찍고 SNS를 찍는 것이다. 내가 이대로 쉽고 잊히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를 기억해주고 내가 느낀 걸 나눠서 상대방에게 전달하고 싶은 욕구이다. 나의 글을 통해 상대가 조금이라도 바뀌길 원한다면 다음 목적으로 넘어가게 된다.
넷째는 정치적인 목적이다. 여기서 정치적이란 것은 넓은 의미로, 세상을 어떤 방향으로 바꾸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독자를 바꾸고 싶은 욕구이다. 누군가를 만나서 정치나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흥분한다. 나는 말로 상대를 바꾸려는 시도는 시간 낭비와 개인적인 감정의 분출구가 되기 쉽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런 민감한 주제에 대해서 상대를 바꾸기는 쉽지 않다. 내가 말해서 바뀐다면 그는 내가 말 안 해도 바뀔 사람이다. 하지만 글로 설득하는 것은 좀 다르다고 생각한다. 글에는 더 체계적인 스토리가 담겨 있기에 우리의 말과는 다르다. 우리는 우리의 글이 단순하게 읽히고 버려지길 바라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독자의 머릿속에 남아서 그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좀 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면 다른 상황의 사람을 이해하게 도움을 준다면 의미가 있다. 타인의 삶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바꿀 계기라도 준다면 그 글은 영혼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글을 쓰는 것이 이기심과 미학, 역사, 정치의 동기를 가진다면 너무 거창해서 반발심이 들수도 있겠지만, 조지 오웰의 설명을 들어보면 꼭 거창하지만은 않고 공감할 부분이 있다. <지하 생활자의 수기>를 인용하여 내가 글을 쓰고 싶은 나만의 이유를 하나 추가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는 러시아 고전소설로 분류되며 처음으로 끝까지 읽은 그의 책이다. 크게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서론 역할을 하는데 사건의 전개보다는 인간의 비논리성을 어둡고 난해하게 독백으로 묘사한다. 2부는 사건 중심이라 흥미 있게 읽을 수 있다. 어구나 1부를 읽고 나면 더더욱 그렇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공무원을 하다가 은퇴하고 은둔생활을 하는 저자는 친구들의 술자리에서 자신의 아웃사이더 기질만을 확인하고 친구들을 쫓아간 곳에서 창녀 리자를 만나 설교를 하게 되고, 후에 그녀가 구체적인 도움을 청하려고 자신의 집을 방문하는데 그녀에서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고백하면서 성장하는 되는 이야기다. 이 책을 성장소설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내 생각은 작가가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이나 숨기고 싶은 모습을 과감하게 실존주의 소설의 형식을 빌려 털어놓고, 자신을 극복하는 계기가 된 책이라고 생각한다.
1부의 끝부분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종이에 적으면 어쩐지 훨씬 엄숙해지는 것 같다. 종이에 적으면 뭔가 아주 그럴듯해 보이고, 자기 비판도 더욱 철저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럴싸한 말도 절로 떠오를 게 아닌가. 뿐만 아니라 수기를 쓰고 있노라면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다.
글을 쓴다는 건 정말 일답게 느껴진다. 일을 하고 있으면 인간은 선량하고 정직해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것도 하나의 좋은 기회일 수 있다.
주인공은 리자를 만나며 자신의 속마음을 괴로워하며 이렇게 털어놓게 된다.
그때 나는 권력이 필요했다. 너의 눈물, 너의 굴욕, 너의 히스테리 -- 그것이 내겐 필요했던 거야!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지.
나는 가난 따위는 부끄럽지 않다고 말했지만, 실은 부끄러워하고 있다. 무엇보다 부끄럽다. 무엇보다 무섭다. 도둑질을 한 것보다도.
인간이 이런 식으로 몽땅 털어놓고 말하는 건 일생에 한 번 밖에 없는 일이거든.
...
즉 내가 누구보다 불행한 인간이라는 것을 그녀는 직감한 것이었다.
그녀는 와락 나한테 덤벼들어 양손으로 내 목을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 책은 이렇게 끝난다.
이 역설가의 '수기'가 이것으로 아주 끝난 것은 아니다. 그는 참지를 못하고 또다시 계속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얘기는 여기서 일단 끝맺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작가는 이 책을 탈고하고 2년 후 그의 대표작인 죄와 벌을 쓰게 된다. 나는 생각한다. 성장하기 위해서, 어제와 다른 내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글로 적어볼 때 우리는 자신을 마주하게 되며 자신을 넘어서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글을 써야 한다. 말을 그냥 사라지지만 글은 그래도 나에게 남아서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