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터의 일 (by 장인성)
언젠가는 내가 사는 집을 직접 디자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기에 관련 글을 찾아보는 걸 좋아한다. 지금까지 읽었던 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다음 스토리볼(지금은 서비스를 접었다)에서 발견했던 <주거의 취향>이다. <주거의 취향>은 ‘ㅇㅇㅇㄹ’이라는 독특한(알고 보니 옥인연립의 자음 글자) 이름의 집에 살고 있는 어느 부부의 공간 구성 이야기다. 이들은 단순히 집을 인테리어 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삶이 스며든 공간을 구성했는데, 디테일 하나하나가 인상적이어서 두고두고 읽곤 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숨겨둔 보물을 보여주는 양 공유하기도 했다. 나도 언젠가 이분들처럼 집을 꾸밀 거야, 하고 말하면서.
부모님께 감사해야 하는 사실인지는 모르겠는데, 내 이름은 연예인 두 명과 관련 있다. 그것도 현재 가장 멋있다고 추앙받는 두 명. 그렇다. 한 명은 정우성이고, 다른 한 명은 조인성이다. 정우성과 조인성을 더하면 정인성이 된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우연히 내 이름과 비슷한 사람을 발견했다. 모음 하나만 위치를 살짝 바꾸면 이름이 같아지는 분이다. 하시는 일도 당시의 나와 같은 마케팅이길래 왠지 모르게 정감이 갔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고, 어느 날 우연히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주거의 취향>을 쓰신 분과 이름이 비슷한 분은 동인 인물이었다. 이럴 수가.
바로 배달의 민족에서 마케팅을 책임지고 계시는 장인성 이사님이다. 그래서 아이돌 오빠를 마음에 품은 어린 소녀처럼 팬심을 담고 있었는데, 최근에 책 한 권을 쓰셨다는 정보를 접하게 됐다. 나름 마케터 출신이기에 제목만 봐도 눈길이 가는 <마케터의 일>이란 책이다. 당연히 책바에서도 판매하기 시작했고, 신기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님이 홀연히 책바에 방문하셨다. (훌륭한 타이밍!) 어쨌든 의도치 않게 사인도 받았고, (읽고 싶은 수많은 책들이 쌓여 있었지만) 만사를 제치고 읽기 시작했다.
<마케터의 일>은 놀라운 책이다. 갓 마케팅에 입문한 신입부터 배테랑 마케터까지 모두 마음에 새겨야 할 내용들이 담겼다. 트렌드를 쫓지 않고 본질을 보는 자세를 이야기한다. 오랫동안 곁에 두고 싶은 책이다. 사실 표지를 접하는 순간부터 놀랐는데, 단순히 <마케터의 일>이 아닌 <마케터 ____의 일>이라며 독자 스스로가 이름을 쓸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자연스레 SNS에 공유하는 빈도도 높아지고, 중고책으로 판매하기 힘든 효과마저 발생한다. 출판사인지 아니면 저자의 아이디어인지 모르지만 감탄했다.
읽으면서 반성도 많이 했다. 업무로 하면 6년, 공부까지 포함하면 10년을 마케팅과 함께 했다.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초심과 멀어졌다는 걸 느꼈다. 마케터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명민함인데, 읽으면서 내가 가진 날이 많이 무뎌졌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돌(을 포함한 젊은 세대들이 좋아하는 콘텐츠)에 관심 갖지 않고 유튜브를 멀리했던 모습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덕분에 마음가짐을 바로 잡게 됐다. '모르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은 명백히 다르다.'라는 말이 머리 속을 맴돈다.
#기억에 남기고 싶은 문장
일의 종류가 바뀌고 산업군이 달라져도 일의 근본은 바뀌지 않습니다. 물론 바뀌는 것도 있죠. 공중파 TV에서 케이블 TV, IPTV,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이제 유튜브로. 그러나 이런 건 마케팅의 본질이 아니라 현상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변할 거예요. 이런 미디어나 채널을 활용하는 기술은 그때그때 부지런히 익혀야 하지만, 이런 기술에 정신을 빼앗겨 본질을 까먹으면 안 됩니다. (p.19)
깊은 경험만이 경험 자산이 되는 건 아닙니다. 얇고 폭넓은 경험이란 항목도 있어요. 그런 면에서 취향과 경험은 조금 다른 맥락이에요. 마케터가 아이돌을 모른다는 건 자랑이 아닙니다. 좋아하지 않을 수는 있죠. 모르는 건 별개예요. 아이돌 음악이 취향이 아니라도 요새 유행한다는 곡들은 한 번씩 들어주고, 유튜브에서 방탄소년단 영상도 찾아보며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 공감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p.30)
-> 이 문장을 읽고 방탄소년단의 이번 신곡 뮤비를 비롯해 영상들을 찾아봤다. 물론 이게 끝은 아니다.
제가 만약 카페를 연다면, 뜨거운 아메리카노는 두 종류로 하겠습니다. ‘지금 마실 아메리카노’, ‘이따가 마실 아메리카노’. 고객이 ‘지금 마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 끓듯이 뜨거운 아메리카노에 얼음 두 알 넣어드릴게요. (p.43)
우리 상품의 특징이 있을 거잖아요. 좋은 점, 특이한 점도 있고, 약점도 있을 겁니다. 엄청 예쁜 컵인데 좀 비싸, 진짜 맛있는 과일인데 봄에만 잠깐 나와, 재미있는 영화인데 자랑할 만한 유명 배우가 없어, 이런 거 말이죠. 팔아야 할 상품의 핵심역량을 파악하고, 가장 열광할 한 사람을 생각해봅니다. 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에게 팔 수 없다면 많은 사람에게도 팔 수 없습니다. 한 명을 깊이 감동시킬 수 있다면 이 작은 성공을 복제할 수 있습니다. (p.69)
그럼 어떻게 해야 디테일을 철저하게 챙길 수 있는 걸까요? 디테일의 품질을 높이려면 ‘이 정도면 됐다’하는 기준이 높아야 합니다. 이것저것 본 게 많으면 기준이 올라갈 수 있어요. 그중에서도 잘하는 것, 좋은 것을 많이 보면 디테일이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p.127)
만약 마케터가 ‘이 부분의 글씨가 좀 더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이유가 있을 겁니다. 네, 목표죠. ‘이번 목표를 달성하기에 이것으로 충분한가? 아닌 것 같다’고 판단한 거잖아요. 그렇다면 디자이너에게 우리의 목표가 뭐였는지 말하고, 이렇게 하면 목표 달성이 될지 안 될지 고민을 이야기하면 됩니다. 고민을 공유하고 방법은 디자이너가 찾을 수 있도록 해주세요. 디자이너는 꼭 글씨를 키우지 않고도 색을 바꾼다거나, 무게감을 더한다든가, 위치를 옮기는 것으로 목표에 더 잘 맞는 안을 제시해줄 수 있습니다. (p.150)
설득은 이해시키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설득의 절반은 이해하는 과정입니다. 이해하려면 여백이 필요합니다. 아직 마음을 굳히지 않은 공간 말이죠. 확고하지 않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때로 내가 설득당해도 됩니다. 내 의견을 관철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의 해결책이 나아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p.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