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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애 Mar 05. 2021

낯설지만 가까운 친절

외롭지 않은 세상을 만드는 법


한 치킨집 사장님이 화제다.

코로나로 본인도 힘드시면서 우연히 만난 청소년 형제를 도왔다는 것이다. 나는 사연을 읽으면서 눈물이 자꾸만 차올랐다. 낯선 이가 낯선 이를 돕고 다시 감사를 나누는 그 장면이 참으로 숭고하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적지 않겠다. 나의 축약보다 원문 그대로를 접했을 때 오는 감동이 더 큰 법이니까)


나에게도 이런 낯선 도움들이 준 감동이 있다.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갑자기 나에게 다가와 순수와 따뜻함을 느끼게 해준 순간들.


#새벽 지하철


"여기서 내리지 않아요?"
"어머! 맞아요!"

나는 매일 새벽 지하철 첫차를 타고 출근한다. 학창 시절 주구장창 했던 0교시보다 더 이른 시간이다. 새벽 기상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부지런하게 이른 아침을 맞아 볼까? 와 같은 다짐으로 해결될 게 아녔다. 잠의 한가운데서 깨는 느낌이었다. 딥 슬립은 번번이 실패다. 그래도 지각에 대한 두려움이 큰 편이라, 밤을 새워서라도 출근했다.


하지만, 그 날은 정말 몇 년 동안 단 한 번 있는 일이었다. 내가 지하철에서 잔 것이다! 전날 무리하지도, 그날 딱히 피곤하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방심한 것이다. 내가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내 어깨를 두드리는 낯선 손길 때문이었다.


"여기서 내리지 않아요?"
"어머! 맞아요!"


그분이 없다면 발생했을 일들을 생각하니 식은땀이 쭉 났다. 그런데, 그렇게 고마운 분께 나는 '고맙다'는 말을 여태 하지 못했다. 고마움을 건네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커질수록 그분에 대한 감동도 계속 떠올랐다. 새벽 첫차, 만 챙기기도 벅찬 시간이다. 잠과 싸우느라 출근이란 허탈함을 달래느라 감정을 그래프로 그린다면 아마 저 밑바닥일 것이다. 이런 새벽 출근의 무게를 알기에 그분이 참 고마웠다.


부끄럽게도,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나는 그분이 같은 새벽 첫차를 탄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만큼 나는 나의 무게를 감내하느라 무심했다. 그 일 덕분에 그분도 나와 같은 소수  정예 새벽 출근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는 나를 챙기고 있구나, 일터로 나와 같이 싸우러 나가겠구나, '함께' 이 새벽의 공간과 새벽의 감정을 공유하고 있구나. 나는 무언가 소중한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아 그분이 더욱 고마워졌다. 그리고 외롭지 않아졌다.


하지만 나는 그분께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못했다. 당일엔 경황이 없었다. 다음날엔? 우리는 계속 매일 새벽 첫차에서 마주친다. 목적지 또한 같다. 깨달음이 크다고, 용기까지 커지는 건 아니었다. 나를 가로막는 건 '오지랖'일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는 '고마움'이란 내가 직접적으로 알고 있는 이들 사이에서 나눠야만 하는 말인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라고 하면 갑분싸가 되는 건 아닐까, 머쓱해지는 건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분과 나의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그녀에 대한 고마움을 마음속에만 간직해버렸다. 사실 우리는 새벽 출근이란 고단함을 누구보다 공감할 수 있는 '가까운 사이'일 텐데.


#노점상


'건강이 악화되어 당분간 쉬게 되었습니다.
찾아와 주신 분들께 죄송합니다.'

어김없는 새벽 출근길, 한 노점상 앞에 이런 문구가 갑작스레 붙었다. 그다음 날, 다다음날, 아니 몇 달이 지나도 문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토록 오래 아프실 수 있다니. 나는 그곳을 방문한 적은 없고 스쳐 지나가기만 한 사람이다. 그만큼 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이상하게도 계속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댓글이 달렸다. 문구가 적힌 A4용지 주변에 펜과 연필로 낯선 타인의 말들이 더해졌다. '얼른 쾌차하세요' '빨리 나으시길 기도할게요' '힘내세요' 나는 그 순간, 또 감동에 휘말렸다. 오지랖일까 봐 걱정만 하고 아무것도 쓰지도 응원도 못한 나보다 더 적극적인 사람들을 보면서 말이다.



인간이 타인을 걱정하는 마음은 디폴트인 것 같다. 나와 거리가 가깝고 멀고는 상관이 없다. 나와 가까운 관계니 더 신경 쓴다고 확신할 수 없다. 가까워서 더 알려는 노력을 멈추기도 하고, 반복되는 아픔이라며 외면하기도 한다. 또한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늘 관심을 가지는 건 아니다. KBS 다큐인사이트 <아임 뚜렛>에서 나왔듯, 우리는 낯선 이의 아픔에 들여다보기보다 멀어지길 선택한다. 순수한 도움은 나와 너, 손뼉이 맞아야 할 일이지 모른다.


타인을 향한 걱정과 관심이란 인간의 기본 태도보다, 가끔 다른 명령이 우선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 명령이 무엇에 의해 만들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오지랖에 대한 걱정도, 이기심도, 여유 부족도 이유가 될 수 있다. 다만, 오지랖과 친절이란 한 끗 차이를 이해하면 낯선 이의 ''이 바뀔지도 모른다.


그분이 나를 깨워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 정거장을 지나쳤을 것이고, 새벽엔 지하철이 많이 없어서 돌아가려면 더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하고, 택시를 타기엔 출구로 나가 잡는데 시간이 훨씬 걸리고... 지각을 한다면 일은 밀리고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지각한 경험이 다른 출근 날에도 영향을 줘 조마조마하게 만들고... 윽! 정말 그분은 평소 걱정이 많은 나를 위해  정말 큰 일을 한 것이다!


치킨집 사장님이 나와 많은 이들을 감동시킨 건 다른 명령들에 의해 숨겨왔던, 혹은 손뼉도 마주칠 거란 기대 없이, 그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인간의 디폴트를 그저 보여줬기 때문이 아닐까? 그때 우리는 낯선 이들과 가까워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낯선 타인과 도움을 주고받고
갑자기 사는 게 외롭지 않아진
그런 사연들이 많아졌으면


오늘 산 김밥에서 우연히 발견한, 낯선 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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