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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포 Apr 03. 2019

불행과 다행 사이

여행 출발 하루 전날 밤이었다. 짐을 다 싸고 여유롭게 인터넷 면세점으로 쇼핑을 하다 여권 유효기간이 5개월 며칠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순간 마음이 쿵 내려앉는 듯했다. 남편과 3개월 전부터 계획한 대만 여행이었다. 대만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유효기간이 최소 6개월 이상 남아 있어야 했다. 검색해보니 여권이 행정 착오로 잘 못 발급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족 사망과 같은 긴급한 인도적 사유나 공무, 출장 등의 이유로만 인천공항 외교부 민원서비스에서 긴급여권을 발급해준다고 나와 있었다. 나의 사유는 ‘긴급’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단순 여행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어느 때보다 긴급했다.

남편은 못 가도 괜찮다며 이 시간도 추억일 거라고 위로했지만 항공비와 숙박비로 사용한 돈이 100만 원이었다. 집 앞 카페에서 필요한 서류를 인쇄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미리 사유서를 썼다. 여권 만료일을 착각하게 된 경위와 손해 보는 비용, 이 여행의 중요성에 대해 구구절절 썼다. 연애편지를 쓸 때도 이 정도의 간절함은 아니었다.


민원서비스는 오전 9시부터 업무 시작이고 여권 발급에는 1시간 30분 이상이 소요된다고 했다. 낮 12시 30분 출발 비행기였기 때문에 10시 30분부터는 체크인을 해야 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여권 발급이 되더라도 비행기를 타지 못할 수도 있었기에 민원서비스 대기명단에 이름을 적으려 새벽부터 인천공항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공항버스에 자리가 한 자리밖에 없었다. 입석도 불가. 남편에게는 다음 차를 타라고 하고 혼자 버스에 올랐다.


대기 번호 7번에 이름을 쓰고 줄을 서서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부디 나를 담당하는 직원이 넓은 마음의 소유자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무릎이라도 꿇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직원은 한참 서류를 살펴보더니 “10시 50분에 오세요.”라고 말했다. 순간 ‘간다!’라고 외칠 뻔했다. 가는 것이다. 갈 수 있는 것이다! 불안감에 새벽 3시부터 잠들지 못해 벌게진 눈에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10시 50분이면 남편이 체크인 카운터에 미리 줄을 서면 되는 시간이었다. 모든 게 잘 진행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되어 체크인 카운터 위치를 확인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우리 비행기는 없었다. 다시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예약 확인서를 보니 이번에는 터미널을 착각한 것이었다. 2터미널은 버스로 20분이 넘는 거리였다. 혼비백산해서 남편을 먼저 보내고 나는 여권을 받자마자 뛰어서 택시를 타고 내려서 또 뛰었다. 그리고 마침내 탑승구에 섰다.


모든 게 엉망이었지만 비행기에 앉아 남편과 나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전까지 못 갈 줄 알았는데 다행이었다. 잘 못 계산한 여권 만료일부터 터미널을 착각한 것까지 하마터면 갈 수 없었던 수 많은 이유와 그 이유를 상쇄한 여러 행운을 하나씩 헤아려봤다. 모든 불행 사이에 다행이 있었다. 가까스로 간 여행이라는 생각에 모든 시간은 선물 같았다. 날씨가 좋지 않아도, 계획한 대로 일정이 진행되지 않아도 불행 사이에 숨어있는 다행을 찾아내며 즐거워했다. 이쯤 되니 매일의 일상이 모두 불행과 다행 사이 어딘가에 걸쳐 있지 않나 싶었다. 아니 어쩌면 불행과 다행은 서로의 등을 마주 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생각 때문이었는지 여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날 한파로 인해 꽁꽁 언 보일러를 드라이기로 녹이면서도 수도관이 얼지 않은 다행에 감사했고, 두 시간을 보일러와 씨름하면서도 결국 따뜻한 물이 나오는 다행에 감사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며 내일도 불행 속 다행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여권을 다시 만드는 것은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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