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놀이터에 멍하니 앉아있으면 개미가 자기보다 몇 배는 무거울 법한 빵 조각을 들고 가는 모습이 보인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개미는 몸 구조상 자기 몸무게의 5천 배까지 들 수 있다고 한다. 역도 선수를 제외한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몸무게는커녕 10살짜리 아이를 안고 돌아다니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나만 해도 집에서 키우는 말티즈를 안고 근처 슈퍼에라도 다녀오면 팔이 뻐근하다.
짐을 나르기 위해 물건을 들거나, 근육을 단련하기 위해 바벨을 들기도 하지만, 사람이 다른 사람을 번쩍 드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보편적으로 인간이 누군가에게 가장 많이 번쩍 들어 올려지는 시간은 태어나면서부터 7년 이내일 것이다. 어린 시절을 제외한다면 갑자기 쓰러졌다거나, 어딘가 아파서 옮겨지는 경우가 대부분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들어 올려지는 것이 꽤 로맨틱하게 비치는 경우가 있는데, 드라마나 영화에서 술에 취한 애인을 업어 집에 데려다주는 장면이 그렇다. 업힌 채로 술김에 속마음을 고백하기도 하고, 술주정을 부리며 서운한 마음을 토로하기도 한다. 9년이나 연애를 했지만 나에게는 이런 기회가 없었는데 아무래도 남편도 나도 술을 마시지 않아서인지 모르겠다. (술을 마시는 다른 사람들은 종종 업힐 기회가 있는지 궁금하다.) 결혼 후에도 나는 별다르게 들어 올려질 필요나 기회를 찾지 못했고, 그래서 아주 최근에서야 업어주는 것이 지극히 드라마적인 연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퇴근한 남편에게 달려가서 뛰어올라 안기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2002년 월드컵에서 박지성 선수가 골을 넣고 히딩크 감독에게 안겼던 것처럼 한번 해보고 싶었다.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혹시 남편이 뒤로 넘어지지는 않을지 걱정이 됐다. 남편이 180cm에 건장한 체격이긴 하지만, ‘등빨’로 따지자면 나도 못지않기 때문이다. 170cm의 키, 넓은 어깨, 표준체중과 과체중 사이를 오가는 몸무게를 잠시 생각한 뒤 남편에게 물어봤다. “여보, 내가 뛰어가서 당신한테 매달려서 안겨도 돼?”
남편은 달려오는 건 안 되고 조심조심하면 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의자에 올라가서 적당히 높이를 맞추고 남편은 스쿼트를 하듯 자세를 잡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남편 어깨에 팔을 걸치고 한 발씩 코알라처럼 매달렸다. 남편은 놀이기구를 태워주듯 거실을 몇 번 왔다 갔다 했다. 내친김에 업는 것도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업는 건 안는 것보다 쉽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조심조심 업혔다. 남편은 아까처럼 거실을 조금 돌다가 나를 내려줬다. 오늘은 영업 종료라고.
드라마에서처럼 로맨틱하진 않았지만 꽤나 만족스러운 경험이어서 다음번엔 ‘공주님 안기’도 가능하냐고 물었다. 남편은 고개를 저었다. “여보, 공주님 안기는 불가능해.” “왜? 드라마에서는 하잖아.” “드라마잖아.” “그럼 다른 사람들도 불가능한 거야?” “응. 3대 400은 해야 할 걸.” 벤치프레스, 데드리프트, 스쿼트를 각각 한 번씩 들어 올릴 때 최대 중량을 합쳐서 400kg을 말하는 게 3대 400이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남편은 나를 들어 올리지 못하는 걸 변명하는 것 같아 멋쩍다면서도 사람은 물건과 다르게 움직이고 무게중심이 분산되어 있어서 들기 더 어렵다고 덧붙였다.
드라마는 현실이 아니라는 걸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런 부분에서까지 속을 줄이야. 술 취한 사람을 업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것도 겨우 가능한 일인 데다가 만화에서 나오는 공주님 안기는 거의 불가능한 영역이라니. 드라마와 현실의 차이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여자 연예인보다 단연 무게가 많이 나가는 나인가, 아니면 3대 400은커녕 3대 100도 어렵다는 남편의 힘이 모자란 것인가. 남편 말고는 이 실험(?)을 해볼 사람이 없으니 안타깝다. 부디 ‘공주님 안기’를 시도해 본 사람이 있다면 알려주기를 바란다.
“여보, 내가 운동 열심히 해서 올해 안에는 ‘공주님 안기’를 해볼게!” 나는 괜찮다고 손을 휘적휘적 저었다. 애초에 나는 공주님이 아니고, ‘공주님 안기’가 필요하지도 않다. 아마 코알라같이 남편에게 매달렸던 것처럼 ‘공주님 안기’도 엉거주춤한 자세일 것이다. 그저 우리 부부의 ‘공주님 안기’ 실패를 널리 알려 드라마의 연출과 현실의 간극에 서 있는 연인들의 민망한 순간을 막는다면 그것으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