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이포 Mar 25. 2021

제1차 발사믹 식초 전쟁

데이트를 할 때 나 혼자 세운 원칙이 있었다. 걸을 때 절대 옆에 있는 매장이나 좌판을 기웃거리지 않을 것. 혹시라도 내가 뭔가 갖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남자친구가 사주지 못해 속상하거나 부담을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연인이 뭔가를 사주는 것이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필요한 게 있을 때 내가 사는 것이 좋았다. 게다가 우리 둘 다 가진 것이 없는 대학생이었다. 남자친구는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벌었고, 나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을 벌었다. 과외하는 학생이 늘어날 때면 내가 남자친구보다 훨씬 돈이 많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한 후에도 내 원칙은 그대로였다. 그러다가 남자친구가 회사에서 이탈리아로 출장을 다녀온다길래 처음으로 사달라고 한 게 있었다. 이름 있는 브랜드의 가방이나 지갑이 아니었다. 이탈리아의 진짜 명품, 발사믹 식초와 올리브 오일이었다. 나는 여행을 가면 꼭 현지 식재료를 한 두개는 사 왔다. 물론 한국 마트에 가도 널려있고, 해외직구를 해도 되지만, 그래도 현지에서 사 오는 것은 다른 느낌이었다. 남자친구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진짜 다른 건 필요 없어. 발사믹 식초랑 올리브 오일이면 돼. 알았지?”


그리고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오랫동안 못 본 연인을 기다리는 마음 반, 이탈리아에서 직접 공수한 발사믹 식초와 올리브 오일을 기다리는 마음 반으로 설렜다. 카카오톡으로 저녁에 보자는 메시지가 왔다.

[피곤하진 않겠어? 선물은 다음에 줘도 되는데.]

[아, 너무 일정이 빡빡해서 아버님 와인만 샀어.]

[뭐? 발사믹 식초랑 올리브 오일은?]

[그건 못 샀는데...]

[아니 왜? 그럼 내 선물은 하나도 안 샀어? 우리 아빠 선물 말고 내 선물은?]

[미안.. 어쩌다 보니 못 샀네.]


카카오톡으로 화를 벌컥 냈다. 어떻게 이탈리아를 다녀오면서 여자친구 선물을 안 사 오냐느니, 우리 팀장님도 엊그제 출장 다녀오시면서 과자라도 하나 사 오셨다느니, 내가 평소에 뭐 사달라는 게 있었냐느니 하고 한참을 쏟아부었다.

[사실은... 가방 샀어. 서프라이즈로  주려고....]

이 말이 나를 더 화나게 했다. 내가 사달라고 한 적도 없는 가방을 서프라이즈 선물로 사서, 왜 내가 이렇게 화를 낼 때까지 말을 안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저녁에 만났지만, 지금은 선물을 받고 싶지 않다며 가방을 돌려보냈다. 남자친구보다 선물을 기대했던 것 같은 내 모습이 싫었고,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화를 내서 속상했다.


2주 뒤, 남자친구는 캐나다 출장을 다녀왔다. 이번에는 메이플 시럽과 메이플 시럽이 들어간 초콜릿, 캐나다의 겨울이 느껴지는 마그넷까지 바리바리 사 왔다. 그리고 가방과 함께 나에게 건넸다. 2주 전이 떠올라 나는 고맙다고 말하면서도 엎드려 절 받는 것 같아 머쓱했다. “지난번에는 미안해. 해외에 별로 안 가봐서 선물을 사 와야 하는지 몰랐어. 나는 선물로 특별한 걸 사다 주고 싶었는데, 그런 게 잘 안 보이더라고. 발사믹 식초랑 올리브 오일은 한국에도 있다고 생각했지.” 내가 출장이나 여행을 가서 당신을 생각하며 골랐던 작은 선물들의 의미를 이야기했지만 여전히 남자친구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고백할 게 있다며 화를 내지 말라고 했다.


“말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사실 이 가방,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날 롯데 프리미엄 아울렛에서 샀어. 뭐라도 사야겠다고 생각해서....”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지만 약속한 것처럼 화내지 않았다. 이미   전부터  맞은 강아지 분위기를 내는 남자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혼자서 선물의 의미를 규정짓고 그것으로 나에 대한 사랑을 가늠하려던 마음은 내가 세웠던 데이트의 원칙과는 전혀 달라서  민망한 기분이었다. 차라리 현대백화점 식품관에 가서 발사믹 식초를 사지 그랬냐고 물었지만 그때는 경황이 없었단다. 가방은 명품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내가  정도로 유명한 브랜드의 제품이었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돈을 썼을까 생각하니 지금도 속이 탄다. 아마 내가 자산  가장 값어치가 나가는 것이리라.


“내가 발사믹 식초랑 올리브 오일은 오크 통째로 사줄게!” 아직 그 오크 통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그날 이후로 남자친구는 남편이 된 지금까지 출장이나 여행을 갈 때마다 꼬박꼬박 선물을 사 왔다. 컴퓨터에서 산출된 출력값 같아 좀 찜찜한 마음이 들었지만 굳이 따지자면 내가 그 명령어를 입력한 장본인이었다. 길거리 좌판에서 귀걸이 하나도 관심 있게 보지 않았던 내가 남자친구를 타박해서 선물을 사 오도록 한 건 무엇 때문이었는지 아직까지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아마 함께 있지 않은 공간에서 나를 생각해주었으면 하는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을 구체화한 것이 선물이라고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아니 어쩌면 정말 이탈리아산 발사믹 식초와 올리브 오일이 탐이 났었는지도 모른다.


결혼식에 가기 위해 잘 차려입고 나의 유일한 명품 가방을 멜 때, 샐러드 드레싱으로 발사믹 식초와 올리브 오일을 뿌릴 때 7년 전 왜 내 선물을 사 오지 않았냐고 화를 내던 부끄러운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는 자기가 미숙했다며 겸연쩍은 표정을 짓는 남편에게 여전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이제는 내 것보다는 우리의 것이 더 많아져서 선물을 하는 것도 조금은 다른 느낌이 되었다. ‘제1차 발사믹 식초 전쟁’은 지나갔지만, 살아가면서 또 다른 부분에서도 ‘나’와 ‘너’로 다르게 살았던 오랜 시간의 틈이 드러날지 모른다. 그때, 서로가 생각하는 선물의 의미를 맞춰가는 과정에서 배웠던 것들이 남편과 나를 남이 아닌 우리로 살아가게 하는 데 힌트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공주님 안기’의 오해와 진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