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이포 Apr 01. 2021

스위트 ‘전세’ 홈

비록 은행의 힘을 빌려 전세로 살고 있지만, 아파트에 산다는 건 여러모로 좋은 점이 많다. 주기적으로 소독도 해주고, 분리배출이나 쓰레기를 버리는 것도 수월하다. 남편은 CCTV와 1층 현관 방범 시스템을 마음에 들어한다. 첫 신혼집이 1.5층의 다세대 주택이었기에, 남편은 나 혼자 집에 있는 시간에 걱정을 많이 했다. 절대 창문을 열어두지 말라고, 문은 이중으로 잠가야 한다고 잔소리를 했다. 지금은 18층에 살고 있으니 누가 베란다로 침입할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남편의 걱정이 기우였다면, 예전 신혼집에서 나는 조금 다른 종류의 불안을 느꼈다. 시작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다음날이었다.


하루 더 휴가를 내서 낮에는 여독을 좀 풀고, 저녁에는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친정에 다녀왔다. 우리 집이었던 곳이 어느새 엄마 집이 되어버렸다는 게 이상했다. 남편과 같이 집에 돌아가면서도 결혼한 게 실감이 잘 나니 않았다. 집에 도착하니 밤 11시였다. 낯선 우리 집. 얼른 씻고 자야 내일 출근할 때 조금이라도 덜 피곤하겠지 생각하며 신발을 벗었다. 어두컴컴한 바닥에 발을 딛는데, ‘찰박’하는 소리가 들렸다. 축축한 느낌. 불안이 엄습했다. 허둥지둥 불을 켜보니 바닥이 온통 물바다가 되어있었다. 벽지는 깨끗했다. 어딘가에서 물이 역류한 것 같았다. 화장실, 아니면 싱크대. 어쩌면 둘 다일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물이 더 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일단 장판 위를 닦아내는 게 급선무였다. 걸레와 수건을 총동원해서 바닥을 닦았다. 걸레질을 하는 내내 남편은 거의 패닉 상태였다. 다 닦아냈다고 생각했을 때, 장판을 슬쩍 들어보니 그 아래 콘크리트 바닥까지 젖어있었다. “여보, 일단 당신이 좀 더 닦아봐. 내가 나가서 신문지라도 있는지 볼게!” 나는 남편을 두고 집을 나섰다. 아파트에서 분리 배출할 때 가득하던 신문지는 동네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편의점에도 팔지 않았다. 신문지를 대체할만한 것. ‘박스!’ 문을 닫기 시작한 슈퍼에 가서 박스를 얻었다. 들 수 있는 만큼 들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들어갔다. “여보, 이거 봐! 내가 박스 구해 왔어! 잘했지?” 남편은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사실 나는  상황이 당황스럽긴 했지만 왠지 조금 재미있기도 했다. 전혀 화가 나거나 속상하지 않았다. 평생 언제 이런 경험을 하겠는가? 게다가 안방과 옷방은 젖어있지 않으니 다행이었다. 이런 종류의 일은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한참을 치우고 닦고, 씻고 나니 새벽 2시였지만, 시차 덕분에 견딜만했다. “여보,   아니야. 괜찮아. 우리 둘이 힘을 합쳐서 문제를 해결했어!” 나는 밝은 목소리로 다독였지만 남편은 여전히 어두운 표정이었다. “여보, 미안해. 내가 당신을 이런 집에 데리고 와서 고생시키고. 당신은 멀쩡히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장모님 장인어른한테도 죄송하고....”   같은 목소리로 말하는데 내용이 너무 웃겨서 나는 그만 깔깔거리고 말았다.


그날, 남편은 거의 자지 못하고 새벽부터 집주인에게 문자를 보냈다고 했다. 출근할 때 보니 옆집 현관에서는 물이 콸콸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도관에 이상이 있었는지 빌라 전체가 물바다였다. 장판을 걷어놨지만 퇴근하고 집에 왔을 때도 콘크리트 바닥은 젖어있었다. 다시 신문지를 구하러 동네를 돌아다녔다. 근처 아파트를 기웃거려봐도 신문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정육점 앞을 지나가는데 한가득 쌓인 신문지가 눈에 띄었다. “저, 아저씨. 혹시 신문지 좀 주실 수 있으세요? 집에 물이 새서 바닥을 말려야 해서요.” 정육점 아저씨는 흔쾌히 신문지를 내주셨다. “젊을 때는 사서 고생도 한다고 그러잖아요. 나도 옛날에 참 힘들게 살았는데.... 살다 보니 좋은 날도 오더라고요. 힘내요!” 물이 새는 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어지간히 안쓰러웠는지 몇 마디 위로의 말을 더 보태주셨다.


바닥을 말리려면 보일러를 트는 게 좋다고 해서 한여름인데도 며칠 난방을 했다. 제습기도 종일 틀었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는 그럭저럭 젖은 바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침수의 영향인지 벽지가 찌글찌글하게 울기 시작했다. 날이 추워지면서 결로가 생겨 안방 한쪽 벽에는 곰팡이가 잔뜩 폈다. 일 년쯤 더 살았을 때는 화장실 천장에서 물이 새기도 했다. 남편이 자취하려고 대충 고른 집에 들어간 것이 문제였다. 짙은 갈색 몰딩과 도어록이 설치되지 않은 철제문, 나무로 된 낡은 창문틀, 녹물이 나오는 수도꼭지.... 대출을 받으면 조금 더 나은 곳에서 살 수 있었을 텐데 대체 왜 이런 집을 구했을까 싶었다. 잘 불평하지 않고 자족하는 남편의 강점이 이상하게 발현된 결과였다. 나는 꽤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전세 계약이 끝나갈 즈음에는 남편이 나에게 상의 없이 2평짜리 집을 2억에 계약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아파트로 이사하기 전날, 우리는 이삿짐으로 어수선한 집의 영상을 찍었다. 아쉬운 마음은 조금도 없었지만, 벽지에 찌든 때처럼 집 구석구석 눅진하게 남아있는 고생의 시간을 기록하고 싶었다. 둘 중에 한 사람이 먼저 죽는다면 우리는 서로를 추억하며 가장 먼저 물이 새던 집을 떠올릴 것이었다. 이제 더는 하수도 역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밤늦게 불 꺼진 집에 들어올 때마다 종종 그때 기억이 난다. 암담한 상황에서 웃어넘기는 법을 배우고, 울적한 서로의 마음을 보듬는 시간이었다.


전세 계약이 또 끝나간다. 집값이 하도 올라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마주한 또 다른 고생도 물이 샌 그날 밤처럼 언젠가는 추억이 되리니. 서로의 따뜻한 손을 꼭 잡을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1차 발사믹 식초 전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