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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포 Apr 05. 2019

최민석 작가에게서 내 친구의 남편을 본다

링컨은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40세가 넘은 사람의 얼굴에는 그의 성격뿐만 아니라 삶의 전반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이에 상관없이 누군가의 얼굴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자연스럽게 추측하게 된다. 수많은 아이들 사이에서 장난기가 많은 아이가 누구인지를 짓궂은 눈빛만 보고도 알아차릴 수 있는 것과 같다. 항간에는 수십 년 대기업 면접관으로 일했던 사람들이 면접자의 얼굴만 보고 당락을 결정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나는 사기꾼이 얼굴에 사기꾼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지 않기 때문에 얼굴만으로 판단하지 않으려고 경계하는데, 종종 어떤 사람들은 첫인상을 떨쳐버릴 수 없게 만든다. 친인척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내가 아는 누군가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다. 나는 서로 닮은 그들이 부자지간도 아닌데 무의식중에 계속해서 닮은 구석을 찾고, 노력 끝에 발가락이라도 닮으면 ‘역시 그럴 줄 알았어’ 하며 묘하게 안심을 하고 만다.


<글쓰기의 본격적인 잔기술> 강의에서 최민석 작가를 처음 봤을 때도 그랬다. 왠지 모를 친근감이 들었던 이유는 작가의 편안한 말투 때문이 아니라 내 친한 친구의 남편과 닮았기 때문이었다. 친구의 남편이라고 말하지만 나와 동갑내기로 7년을 알고 지낸 그 녀석은 아주 유머러스하면서도 순식간에 시니컬해지곤 했다. 그런데 최민석 작가 역시 나를 깔깔 웃게 만들면서도 어느 순간 예리한 말로 뒤통수를 서늘하게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목소리와 말투도 똑같아서 강의 중간에 깜짝깜짝 놀랄 정도였다. 어느 날은 문득 최민석 작가가 『꽈배기의 맛』에서 ‘음악은 트고 갈라진 영혼의 위무자이자 근사한 친구가 될 것’이라고 쓴 글이 생각났다. 내 친구 남편은 기타를 끼고 살며 자기에게 음악 없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다고 하는 사람이다. 이쯤 되면 정말 얼굴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 채널예스, 최민석 작가 사진_신화섭(스튜디오 무사)

하지만 닮은 점을 보며 신기하다고 생각한 것에서 그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직 하고 나서 특히 전 직장의 지인들과 얼굴이 겹쳐 보이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가 그렇다. 나에게 유독 상냥하고 잘해주었던 전 직장 상사를 닮은 사람에게는 금방 다가가게 되지만, 비협조적이고 지나치게 사무적이었던 모 대리님을 닮은 사람에게는 왠지 벽을 세우게 된다. 그러다가 종종 뒤통수를 맞기도 하는데, ‘같은 사람이 아니니까 당연하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묘하게 실망스러워하는 내 모습을 본다. 그때부터 나는 숨은그림찾기를 그만두고 틀린(다른)그림찾기를 시작한다. 원래 알던 사람과 다른 점을 찾아서 그에게 새로운 캐릭터를 부여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가장 잘 안다고 하면서도 해를 거듭할수록 스스로에 대해 새롭게 발견하는 게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10년을 만나 결혼한 남편은 11년째에 또 다른 모습이다. 하물며 몇 시간 만난 사람을 첫인상으로 가늠하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다시 생각한다. 고작 몇 시간의 강의와 그가 쓴 몇 권의 책에서 알게 된 최민석 작가에게서 보이는 내 친구 남편의 모습은 얼마나 단편적인지. 닮은꼴 찾기와 범주화라는 최면은 익숙함을 가장해 누군가를 그 자체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편견을 갖지 말아야겠다는 다짐보다 더 효과적인 건 사람을 낯설게 보려는 모든 노력이다. 얼굴이 닮은 사람뿐만 아니라 직업이 비슷한 사람들, 학력이 비슷한 사람들, 사는 동네가 비슷한 사람들을 무조건 같은 상자 속에 넣어 놓지 않는 것이다. 햇볕이 프리즘 사이로 빠져나올 때 무지갯빛 색깔이 펼쳐지듯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수많은 아름다운 색의 찬란함을 발견하려는 것이다. 이번 주는 최민석 작가 얼굴이 좀 다르게 보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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