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화 취향은 아주 까다로운데, 그 이유는 지나치게 몰입하기 때문이다. 몰입해서 영화를 보면 좋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좀비 영화에서는 온 힘을 다해 도망쳐야 하고, 일제강점기 시대 영화에서는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펼쳐야 한다. 기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온몸의 근육까지 피로를 느낀다. 그래서 소위 ‘힐링물’을 엄선해서 보는데, 최근 나의 심의를 통과한 영화가 있다. 일본 영화를 리메이크한 임순례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다.
<리틀 포레스트>는 임용고시에 실패한 주인공이 어렸을 적 살던 시골로 돌아가 농사짓고 밥해 먹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왜 리틀 필드(little field)나 리틀 팜랜드(little farmland)가 아니냐면 농사를 짓거나 음식을 하는 '행위’가 아니라 농촌과 숲이라는 ‘공간’이 훨씬 더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시골을 벗어나고 싶어하던 주인공에게 엄마는 ‘이곳의 흙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한다면 힘들 때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단순히 자연이 가져다주는 힘이 아니라 그곳에서 보낸 시간의 힘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나는 여의도가 떠올랐다.
국내 최대의 금융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방송의 핵심이 모여있는 곳. 빽빽한 고층건물 사이로 바쁘게 걷는 사람들. 봄에는 벚꽃축제가 열리고 가을에는 불꽃축제가 열리는 곳.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의도는 나에게 봄과 가을을 제외하면 회색빛을 띄는 그런 공간에 불과했다. 그런데 요새는 지하철 2호선을 타다가 국회의사당만 봐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손발에 힘이 생긴다. 2년 남짓한 직장생활이 여의도의 색깔을 바꿔놓았다.
입사할 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잔뜩 긴장해서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데, 팀원 중 한 명이 잠깐 뭐 좀 도와 달라고 회의실로 부르더니 서프라이즈 입사축하파티를 하는 것이었다. 그전 직장에서 워낙 힘든 시간을 보내서인지 얼떨떨하기도 하고 괜히 코끝이 시큰거리기도 했지만 처음이니까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허니문 기간이 끝난 뒤에도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누구 한 명 일을 미루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일이 많은 사람이 있으면 팀원들은 마치 자기 일처럼 적극 도왔다. 누구의 공도 가로채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추켜세웠다. 부당한 일을 당하고 오면 화를 내며 대신 싸워주고, 기쁜 일에는 모두가 함께 웃었다.
인간관계를 새로 배우는 것 같았다. 함께 슬퍼하는 법, 축하하는 법, 다름을 이해하는 법, 서로의 짐을 짊어지는 법을 사무실에서 배울 수 있었다는 게 지금 생각해봐도 신기하다. 물론 일이 힘들 때도 있었고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험담과 시기와 질투가 없는 사무실로 출근하는 길은 늘 즐거웠다. 그렇게 여의도의 색은 회색빛에서 푸른빛으로 점점 바뀌었다. 빽빽한 고층건물 사이로 깔깔 웃으며 점심을 먹으러 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이러저러해서 다시 새로운 직장으로 옮긴 후, 사람들에게 지치고 일에 지친 마음이 들 때면 여의도의 예전 출근길을 걷는다. 익숙한 길과 상점, 나무들과 마주할 때면 마음이 단단해진다. 여전히 따뜻한 전 직장 동료들의 전화와 문자는 순식간에 내가 있는 곳을 다시 여의도인 것처럼 만든다. 굳은 표정이 부드러워지고 뾰족한 말투가 둥그레진다. 여의도에 켜켜이 쌓인 시간이 나에게 ‘리틀포레스트’의 흙냄새와 바람, 햇볕으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