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이포 Jan 29. 2022

“엄마, 설날에 올라오는 기차표는 없어”


밤에 기도하면 엉망이었던 삶이 조금은 제자리를 찾게 되어 좋다.


아침에 남편이 해독주스를 마시며 말했다.

“당신 어제 장모님이랑 통화할 때 잘 참더라.”

“그치? 아니 근데 그게 느껴졌어? 내가 참는지 어떻게 알았대?”

“화가 나는 것 같았는데 보니까 잘 참더라고. 내가 소화제 안 먹는다고 했을 때도 화 안 내고 잘 참고. 약병은 집어던졌지만.”

“…..”

모른척하고 엄마 얘기를 이어갔다.

“엄마가 시댁에서 설 전에 올라오면 어떡하냐고 자꾸 얘기하길래 표가 없다고 둘러댔지.”


기차 표는 이미 매진이라 어떻게 할 수 없는데도 시댁에서 설을 쇠고 오는 표를 끊어야 한다는 엄마의 거듭되는 잔소리에, 속이 좋지 않다면서 내가 권하는 천연 소화제는 한사코 싫다고 하는 남편의 시큰둥한 반응에,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올랐지만 어젯밤 기도하면서 잘 갈무리했다.


나는 화가 많은 편이다. 남편과 엄마는 몹시 고개를 끄덕일테고 어떤 사람들은 갸웃거릴 것이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어느 정도는 알지 모르겠다. 화가 많다고 해서 소리를 지르거나 분을 터뜨린다고 생각하진 않으면 좋겠다. 데이비드 폴리슨의 『악한 분노, 선한 분노』에서는 이렇게 화를 설명한다.

분노란 당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느낄 때 적극 반대 견해를 드러내는 것이다. 분노의 본질적인 DNA는 '격양된 감정'이 아니다. 분노의 핵심은 중요하다고 여기는 바로 그 일이 잘못되었을 때,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대개 일은 잘못되기 때문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영역이 다양할수록, 그리고 중요하게 생각할수록 더 많이 화가 난다. 그렇다고 늘 분노가 옳은 방향이라는 건 아니다. 꼭 필요하기도 하지만 나와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한다. 내가 화를 잘 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부터 나는 ‘비폭력 대화’ 교육을 듣거나 ‘긍정적 훈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분노를 다루기 위해 애써왔다. 상담을 받았을 때도 대부분의 주제가 ‘화’에 관련되어 있었다.


물론 나의 분노가 적절히 쓰일 때도 꽤 있다. 영등포구청역 환승통로에서 젊은 아르바이트생에게 욕을 쏟아내며 위협하던 아저씨를 보고 코레일에 문자를 보낸다거나, 옆집에서 가정폭력이 벌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릴 때 112에 전화한다거나. 어떻게 상황이 해결되었는지 보지 못했지만 잠시나마 곤경에서 벗어났으리라. 한번은 친한 언니가 회사에서 휴일도 없이 늘 밤새다시피 일하는 모습을 보고 고용노동부에 52시간 초과근무로 신고하기도 했다. 며칠 후, 신고한 사람이 회사 재직자 또는 퇴사자 본인이거나 직계 가족이어야만 조사할 수 있다는 고용노동부의 전화를 받았다. 실망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나에게 담당자는 정식 조사는 아니지만 전화로 경고하는 방식으로 내 민원을 처리해주겠다고 했다. 언니에게 불이익이 갈까 봐 언니가 회사를 그만둔 이후에야 내가 신고했다는 사실을 밝혔는데, 언니는 “그게 너였구나!”라며 고용노동부에서 회사로 전화가 온 후로 직장생활이 한결 좋아져서 언니를 비롯한 직장 동료들이 모두 누군지 모를 사람에게 고마워했다고 했다. 회사 사람들은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어제 나의 분노는 다른 종류의 분노였다. 단 한 번도 성별을 이유로 남동생과 나를 차별하거나 나에게 어떤 프레임을 씌우지 않고 키운 엄마가 유독 결혼과 시댁 일에는 ‘딸 가진 죄인’처럼 생각하는 게 매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마 덕분에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으로 자라왔는데, 결혼할 때가 되니 엄마는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가부장제의 면모를 나에게 강요했다. 예단·예물은 안 하기로 했다는 설명에도 뭘 모른다고 성을 내며 반상기에 예단 이불, 예단비, 이바지떡까지 기어코 보낸 엄마.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냐며 화를 냈지만 엄마는 다 나를 위해서라며 되려 더 화를 냈다. 오히려 딸이 많은 시부모님은 여든이 가까우신 나이에도 페미니스트의 면모를 보이신다. 시아버지는 ‘여자는 시집가면 이름을 잃어버린다’라며 며느리나 아가가 아닌 내 이름을 부르시고, 집 명의는 어머님 명의로 해 놓으셨으며, 시어머니께서 허리가 아프신 이후로는 온갖 집안일을 하시는 데다가 장까지 담그신다. 시어머니는 명절에 표가 없으면 못 오는 거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시고, 내가 설거지를 하려고 하면 직장 다니는 애가 명절에 쉬어야지 일하면 몸살 난다고 걱정하신다. 제사도 없고, 명절 음식을 해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피자를 시켜먹거나 밖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은 적도 있다.


뭘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그저 잘해주시는 시부모님께 감사해서 ‘요즘 애들’ 답지 않게 전화도 자주 드리고, 좋아하는 음식도 자주 보내드리며, 명절에는 가능하면 시댁에 오래 있다 오려고 나름 노력하는데 엄마가 나에게 ‘며느리의 도리’에 대해 말을 시작하는 순간 벌컥 화가 난다. 내가 시댁에 잘해드리는 마음은 며느리가 아닌 인간으로서 맺는 관계에 기초한다. 사위에게 요구하지 않는 덕목을 왜 며느리에게 요구하느냐는 말은 이제는 너무 진부해서 쓰기도 민망하지만 ‘유교’라고 쓰고 ‘쓰레기’라고 부르는 성 불평등의 잔재가 여전히 나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남아있다. 사회 문제로서 불평등과 차별에 목소리를 내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엄마와 소모적인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아 “왜 설은 시댁에서 보내야 해?”라는 질문은 꾸역꾸역 속으로 밀어 넣는다. 엄마는 내가 납득할만한 답변이 아닌 잔소리를 시작할 것이며 나는 거기에 반격해 짜증을 내고, 통화는 길어지고 감정이 상하게 될 게 뻔하다. 이 지난한 과정을 결혼 5년 차에 반복할 필요는 없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성경 말씀을 생각하고, 여전히 내가 얼마나 엄마를 사랑하고 존경하는지를 떠올리며 기도로 평정을 되찾을 뿐이다.


‘딸 같은 며느리’는 없다고, 딸은 딸이고 며느리는 며느리라고 하는 말도 이미 나온 지 꽤 된 구식이다. 나는 딸이든 며느리이든 아들이든 사위든 가족이면 가족으로, 한 명의 사람으로 대해주면 좋겠다. 어떤 역할을 기대한다면 왜 그 역할이 필요한지, 성별에 따라 그 역할을 맡아야 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주면 좋겠다. 그런 질문을 받는 순간 대답해야 하는 사람들 역시 자기들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가치에 반하는 말에 분노하겠지만. 덮어놓고 주장하거나 요구하지 말고 ‘왜?’라는 질문에 한번쯤 답해보면 좋겠다.


시간이 흐르고 90년생이 기득권의 연령에 접어들 즈음에는 결혼 문화도, 며느리와 사위의 도리도, 명절 분위기도 꽤 바뀌지 않을까? 최근 드라마 시즌2로 제작된 웹툰 ‘며느라기’가 ‘사료’쯤으로 여겨지는 날도 올 것이다. 그때도 분노할 일들은 여전히 남아있겠지만, 나 역시 꽤나 유연하고 멋진 방식으로 더 나은 화를 내고 어떤 측면에서는 더 많이 인내하는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가족에 관해서는, 음…. 기도도 더 깊어졌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 해의 마지막에 서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