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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꼴리한 말미잘
Feb 15. 2022
내일이면 드디어 새 집으로 이사를 간다. 윤은 잠이 오지 않았다. 열두 살에 서울로 올라와 시작된 남의 집 살이가 삼십여 년이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데 계속 데리고 잘 수도 없으니 더 큰 집이 필요하다. 큰 딸 유가 벌써 초등학교 5학년이니 상급학교 진학도 생각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내 집 마련을 더이상 미루지 않아도 될 정도로 돈도 모았다.
그렇다면 어디로 갈 것인가?
어린 시절 소풍을 갔던, 앵두나무와 능금나무가 아름다웠던 자하문밖 세검정을 떠올렸다. 청와대가 가까우니 만약에 전쟁이 나더라도 대통령이나 고위 공무원들 근처에 있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인근에 명문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많은 점도 맘에 들었다. 시청으로 출퇴근하기에도 괜찮은 거리다.
세검정에서 홍은동으로 넘어가는 사거리에서 상명여대 후문으로 올라가는 산비탈에 땅을 사고 집을 짓기 시작했다. 가파른 산길을 한참 올라가야 했지만 그만큼 주변 경관도 좋고 마당도 널찍하다. 처음으로 갖는 내 집. 빨간 벽돌 2층 집... 꿈만 같은 일이다.
물론 지금 살고 있는 집도 비록 적산가옥이긴 하지만 오랫동안 편하게 살았다.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간 후 민간인에게 불하되었던 적산가옥을 차지한 덕분이다. 입주가능한 적산가옥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자, 어머니는 노량진에서 상도동까지 다듬잇돌을 머리에 이고 걸어서 집을 보러 갔다. (새 집으로 이사 갈 때 다듬잇돌을 들고 가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든 집을 차지하겠다는 의지가 대단했던 것이다. 그 집에서 윤은 결혼도 했고, 동생들을 시집 장가보내고, 아이들도 낳았다.
이렇게 내 집을 장만하게 된 데는 적극적이다 못해 극성과 억척의 대명사인 어머니와, 아무것도 없는 집에 시집와 묵묵히 내조해준 희의 공이 컸다. 홀시어머니와 두 명의 시동생, 두 명의 시누이까지 건사해가며 악착같이 아끼고 살림해준 희가 아니었다면 이런 좋은 날이 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윤에게는 원래 미래를 꿈꾸던 숙이라는 애인이 있었다. 예쁘고 발랄하고 말 잘하던 숙.
"같이 걸어가실래요?"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네?"
"버스 아무래도 끊긴 것 같아요. 000번 기다리시죠?"
"네.. 끊긴 것 같네요"
"걸어갈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우리 같이 걸어가요"
"네?"
"혼자 가려면 무서우니까요"
"네...."
"저 노량진 살아요"
"저, 저도요"
"잘 되었네요"
"...."
"저는 00 국민학교 선생이에요"
"아, 네. 저는 서울시청 다닙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네?'
"딱 봐도 공무원이잖아요"
윤은 가슴이 뛰었다. 밤이라 자세히는 안 보였지만 여자는 젊었고 예뻤다. 아담한 키에 예쁜 스커트와 구두를 갖춰 신은 멋쟁이였다.
버스가 끊겨 한강 다리를 건너 귀가해야 했던 어느 날 밤, 먼저 다가와 같이 걸어가자고 했던 당돌하고 예쁜 아가씨가 숙이었다. 두 청춘남녀는 전쟁 이후 혼란한 세상과 불안한 미래에 대해, 좋아하는 시와 소설에 대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버스는 놓쳤으나 사랑이 온 것이었다.
어머니의 반대만 아니었더라도, 지금쯤 옆에 누워있는 여자는 희가 아니라 숙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 할 수 있는 이 순간, 왜 숙이 떠오르는 것일까?
희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희는 지혜롭고 눈치가 빨랐으며 온순한 성격이었다. 큰 키에 하얀 피부가 버들가지 같았다. 다만 배움이 짧아 윤이 좋아하는 문학이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같이 나눌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당돌하다고 할 정도로 대화에 거침이 없었던 숙과 함께 나누던 시간은 그리움으로 남았다.
희 옆으로 두 아들이 쌔근쌔근 자고 있다. 큰아들 용이는 5살, 막내아들 필이는 3살이다. 딸만 내리 셋을 낳고 마흔이 넘어서 본 아들들이다. 옆방에는 국민학교 5학년, 4학년, 1학년에 다니는 세 딸이 자고 있다. 이 녀석들에게는 집 없는 설움은 겪지 않게 해 주겠다고 결심했었다. 학비 걱정없이 맘껏 공부하고 행복한 학창생활을 누리게 해주고 싶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똘똘하고 건강하게 커주고 있다. 이제 이사 가는 새 집은 이 아이들의 든든한 둥지가 되어줄 것이다.
"안자요? 내일은 새벽부터 바쁠 텐데 얼른 자야죠" 옆에서 희가 졸린 목소리로 말한다.
잘 먹지 못하고 일은 많아서 그런지 바싹 여윈 희를 보니 마음이 아파온다.
윤은 희를 안아주며 말했다.
"얼른 자요. 나도 자야지"
윤은 용이와 필이가 걷어찬 이불을 덮어주었다. 사내녀석들이라 잠버릇이 고약하다. 손 끝에 아이들의 부드럽고도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니 기분이 좋아진다. 윤은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