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멜랑꼴리한 말미잘
Apr 05. 2024
충청남도 예산(禮山)
대학시절 친하게 지냈던 한 친구의 고향이 예산이었다. 학교 간 연대 활동으로 만난 사람들이 대부분 남자였던 시절, 몇 안 되는 여성들 중 서로 마음이 맞아 친구가 되었다. 귀가가 늦으면 우리 집에 와서 김현식의 노래를 들으며 속닥속닥 무슨 할 말들이 그리 많았는지 밤새 수다가 길었다.
그런데 나는 그 친구에게 큰 빚이 있다.
나는 대학 졸업 후 극단에 들어가 연극쟁이 생활을 시작했고, 그 친구는 고향인 예산으로 내려가 부모님의 일을 도우며 농촌 활동을 하고 있었다.
연극쟁이 생활은 배고프고 팍팍했으며 연애 생활은 엉망진창이 되어 상처뿐인 이십 대 중반, 도망치듯 친구가 있는 예산으로 떠났다. 이유도 묻지 않고 그저 편하게 지내다 가라고 받아준 친구와 친구의 부모님 덕에 한참을 예산에서 지냈다. 물론 아침 7시만 되면 방문을 두드리며 '밥 먹어라!'외치시던 아버님 덕에, 제대로 떠지지 도 않는 눈을 비비고 나와 고봉 가득 담아주신 아침밥을 먹어야 했던 건 고욕이었지만,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들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친구의 아버님은 사과 과수원을 비롯한 농장을 하고 계셔서 새벽부터 일을 하셨다. 나는 농사일이라고는 먼발치에서 본 적도 없는 완존한 서울내기였으므로, 아버님은 "잔디밭에 풀이나 뽑아라"하셨다. 그마저도 잔디와 풀을 구분 못하여 금세 쫓겨나고 말았지만....
친구는 근처의 아름다운 사찰이며 명소들을 보여주기도 하고 만화책도 빌려다 주며 나와 함께 해주었고, 나는 몸과 마음을 다잡고 다시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이후 몇 년을 그렇게 나는 또 서울에서 연극을 하며, 그녀는 예산에서 농촌 운동을 하며 지내며 가끔 통화만 하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결혼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몇 년 동안 마음에 두고 있던 사람과 말이다. 너무나도 기쁜 소식이었다.
"결혼식에 와줄 거지? 서울에서 해"
"물론이지! 공연하고 겹치지 않아야 할 텐데"
다행히 그녀의 결혼식은 내 공연 마지막 날 바로 다음날이었다. 꼭 가겠노라 약속을 했다.
"사진 찍어줄 수 있어? 부탁할 친구가 없어"
"물론이지. 걱정 마"
나에게 주어진 큰 임무였다. 항상 도움만 받았던 나는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그 축복받은 날, 제대로 보답하고 싶었다.
지금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은 대충 짐작을 하셨을지도 모른다. 공연 마지막 날 지인 관객들이 많이 왔다.
새벽까지 이어진 뒤풀이 후 집에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결혼식의 존재 자체를 아예 잊어버렸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었다, 연락도 할 수 없고, 오지 않는 나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결혼식 후 남편과 함께 바로 외국으로 떠난 친구는 삐삐에 음성으로 잘 간다고 짧은 인사를 남겼다. 원망도 욕설도 없었다. 나는 해명도 변명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녀의 행복만을 빌었다.
꽤 오랜 기간의 외국 생활을 마치고 두 부부가 예산에 정착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한두 번의 전화통화쯤 있었을까. 십 년 전쯤이었다. 오산에서 한 후배의 결혼식이 있었다. 혼자 참석했던 나는 결혼식 후, 즉흥적으로 예산으로 차를 몰았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친구는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예전에 부모님이 차려주었던 것처럼 푸짐한 밥상을 차려주었다.
충남 예산은 나에게 그 친구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친구와 함께 했던 좋은 기억. 그리고 그 친구에게 지은 죄(?)와 갚아야 할 빛에 대해서. 어떻게 갚아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귀촌(혹은 오도이촌)을 결심했지만. 어느 지역으로 갈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옆지기가 주변에 고민을 털어놓자 여러 지역을 추천받게 되었는데 그중에서 예산 내포리 이야기가 나왔다. 옆지기가 사회생활에서 만난 B 씨의 대학교 선배가 살고 있다고 했다.
"귀촌지역으로는 이만한 곳이 없다는데"
지도로 찾아보니 충남 가야산 도립공원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곳이었다. 수년 전 귀촌한 부부가 집을 짓고 살고 있었고 그 집 앞으로 800여 평의 땅이 있어서 이웃을 구하는 중이라 했다.
B 씨는 여러 번 방문을 했었고, 본인도 그곳으로 귀촌하고 싶다고 했다. 마침 B가 주말에 가기로 했다고 하여 관심 있으면 와서 보는 게 어떠냐고 했다. '예산'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친숙했고, 나의 예산 친구 생각에 뭔가 좋은 기운이 느껴졌다. 근처에 덕산 온천이 있으니 하루 자고 가도 좋겠다는 추천이었다. 주말여행으로도 괜찮을 것 같아서 주말을 이용해 다녀오기로 했다.
아직은 쌀쌀했던 3월 초, 우리는 예산으로 향했다.
B 씨가 경주에서 일을 보고 오후 5시경에나 도착한다고 해서, 우리는 오후에 도착해서 근처를 돌아보고 B 씨의 지인 집으로 가기로 했다. 읍내에 도착하여 커피 한잔 먹으려고 보니, 디카페인 커피를 파는 프랜차이즈 커피숍도 있고 베이커리도 있었다.
"괜찮네. 이렇게 가까운데 읍내가 있으니. 병원들도 있고. 큰 마트도 있고"
일단은 합격이다. 읍내를 벗어나 시골길을 좀 달려가다 보니 가야산이 멀리 보이기 시작하고 새로 지은 집들이 나타나고 큰 카페도 나타난다.
"아무래도 도립공원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많이 오나 보다. 관광지라고 봐야 할까?"
"관광지는 좀 그렇지 않나?"
"수덕사도 멀지 않은 것 같은데"
"관광지 바로 옆만 아니면 괜찮겠지"
조금 더 가자 목적지가 나타난다. 아늑한 산 아래 귀촌한 사람들이 지은 집이 몇 개 있고 아직 비어있는 땅이 펼쳐져 있는 동네다.
차에서 내려 기웃거리니 바로 한 여자분이 나타난다. B 씨의 부인이다.
"서울에서 오셨죠? 들어와서 차 한잔 하세요"
아직 B 씨가 오려면 시간이 좀 남아있었지만 우리는 집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손님 한 분이 와계셨다. 집주인의 후배였다. 그들은 서로 안면이 있는 듯했다. 막걸리를 권하자 옆지기는 운전을 해야 한다고 사양했다.
"한잔 하시고 주무시고 가면 되죠. 우리 집에 오면 무조건 한 잔 하고 가고 가야 합니다"
난생처음 보는 분들과 앉아 막걸리를 먹게 되었다. 지인인 B 씨만 오면 얼굴 보고 일어서자는 게 낯가림 심한 옆지기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B 씨는 오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