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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찬수 Apr 19. 2023

쓰다 보니 좋아졌네

 한 때 키보드를 가지고 우왕좌왕한 적이 있다. 건반 말고 타이핑하는 키보드에 말이다. 항우울제를 복용하기 전 반년정도 아침글쓰기를 약처럼 여기던 때가 있었다.(스스로 필요성을 느꼈다면 그 어떤 심리적 안정수단보다 병원이 우선이다.) 처음에는 집에 있는 랩탑키보드를 사용했으나 매일 3시간에서 4시간 정도를 앉아 있다 보니 목이 아파왔다. 눈높이를 높이려 거치대를 사게 되었고 자연스레 별도의 키보드가 필요해졌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갔을 때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기계식 키보드가 번뜩 생각이 났고 그렇게 몇 개의 키보드를 갈아치우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작가들이 많이 쓰는 키보드를 검색하다가(겨우 일기정도를 쓰면서?)… 시끄러운 건 싫으니(그럼 기계식을 왜?) 저소음 모델을 찾다가… 내 책상에 어울리는 색을 찾다가… 난 컴포트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고 갑자기 풀배열키보드가 항공모함처럼 커 보인 다거나(이때 이미 필요에 의한 구매는 막을 내렸다)… 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결국 산 것은 저소음 적축스위치를 가진 미니배열 키보드였다. 방향키의 불편함은 사고 나서 깨달았지만 아예 안 되는 것은 아니었고 타이핑하는 기분도 나름 재밌어서 만족하며 쓰긴 했다. 이다음은 길게 나열할 일은 아니니 간단히만 요약하자면 호기심에, 변덕에 3번 정도를 더 사고팔고를 반복하고 키캡을 바꾸고 스위치도 바꿔보았다. 음 친구에게 선물도 하나 받았었고.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난 구입이나 행동에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 성격이라 한번 내 품에 들어온 것들은 이미 첫날부터 꽤나 친밀감이든 상태로 마주하게 되어버리는데 아무리 주관적 객관적 기준을 다 만족시켜서 구입했던 것도 ‘계속 만지작 거리게 되는’ 애정이 들지 않았다. 점점 물건에 잡아먹히는 기분 뭔지 아는가?

 결국 중고로 6천 원 주고 산 흔하디 흔한 블루투스 키보드로 정착해 버렸다. 그것도 건전지를 넣어야 하고 페어링과정도 복잡한 구식 키보드였다. 4개월간 소설의 초고는 이 6천 원짜리 키보드로 모두 썼다. 30만 자 가까이 되는 분량이었고 쓰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결론이 좀 이상하지만 이렇게 된 데에 문제는 돈에 있었다. 기계식 키보드는 가격 하한선이 평균적으로 높은 물건이다. 물론 2만 원대 싼 물건도 있지만 가격에 맞추어 낸 물건이라 그 물건 고유의 느낌이 살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지에 없었다. 나는 키보드에 그만한 돈을 들이는 것 자체가 좀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다. 거기다 그때만 해도 카페, 도서관, 벤치(?), 집 여러 장소를 이동하면서 글을 쓸 때라 기계식은 아무리 미니키보드여도 그 부피가 이동에 무리가 있었고 가지고 다닌다고 해도 비싼 물건을 모시고 다니는 느낌이 들어 싫었다.


 6천 원짜리 중고키보드는 소설을 끝낸 후 장렬히 전사해 지금은 사용하지 못하지만 버리지 못하는 소중한 물건이 되어버렸다. 별생각 없이 급해서 산 물건은 사용하다 보니 소중한 것이 되었고 거금을 들여 공부까지 해 나에게 좋으라고 선물한 물건은 애물단지 수준을 넘지 못하고 중고로 팔려간 것을 보면 아이러니하다. 지나고 보면 나에게 ‘비싼’ 키보드는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그 우왕좌왕하는 과정이 그나마 글쓰기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어떤 새로움, 어떤 재미요소를 집어넣어서라도 매일 책상 앞에 자신을 앉히겠다는 발버둥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글쓰기를 유지했던 것은 그때의 내 삶을 지탱하는 기둥들 중 하나였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그러니 비합리적이고 과소비했던 과거의 자신을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겠다. 무언가 일단락되어봐야 그것이 나에게 좋았던 일이었는지 좀 부정적으로 작용했던 일이었는지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그렇지만 그 판단도 미래에 어떻게 수정될지 모를 수 있다는 삶의 진리는 어쩌면 좀 허무함을 안겨줄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허무를 느끼며 뭔가를 덜어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에게 자신에게 타인에게 우리는 너무 많은 기대를 얹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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