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울제를 중단하고 나서의 시간은 생각보다 느리게 가고 있다. 과장을 보태지 않은 체감은 반년은 흘렀다고 말해주는데 돌아보니 이제 막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쉽사리 침체되는 기분과 숨 쉬듯 찾아오는 공황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약의 힘을 빌리지 않고 해내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주마다 방문하던 병원의 선생님에게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의 신체적인 증상과 우울로 빠지는 생각의 흐름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 노력했다고 자신했다. 그것을 선생님도 충분히 느낀 것 같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전문가의 진단을 내렸을 것이다. 때문에 증상은 남아있지만 자생적인 치료가 가능하다는 판단하에 복용중단을 권했다고 생각한다.
처음 진료시간 때 들은 말처럼 약이 해줄 수 있는 역할은 한계가 있다. 이 말은 ‘약을 먹어도 안돼’라는 절망의 말이 아닌 약을 먹지 않고도 해낼 수 있을 때까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친구가 하나 더 생겼다는 말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새삼 약의 힘을 또 느끼고 개인, 사회의 인식이나 용기 그리고 고립 등으로 인해 병원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아파하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다.
의사의 세계는 내가 잘 모르나 환자의 세계에는 분명히 귀천이 존재하는 듯하다. 수많은 안과, 치과, 내과, 외과, 가정의학과의 환자였고 대학병원의 수술대에 오른 가족을 간호해 보면서도 이런 환자의 귀천은 느끼지 못했다. 정신건강의학과를 정신질환을 가진 환자와 그것을 치료하는 의사가 있는 장소가 아닌 흡사 정신범죄자들의 수용소처럼 여기거나 자신도 환자이며 괴롭다 못해 방문했으면서도 끝내 신뢰하지 못한 채 중단해버리거나 여러 개인적인, 사회적인 인식을 뚫고 아픔을 치료하며 착실히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가볍게 여겨 등한시하고 심지어는 그들의 삶자체를 깎아내리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았고 직접 겪었다. 가령 스스로에게서 원인을 찾아보는 하나의 회복방법을 권하며 성찰을 도와주는 것과 다 네 탓이오 성의 말은 큰 차이가 있고 실제 정신질환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심장을 칼로 찌르는 일이다. 또한 우리는 누구나 우울하고 세상에 대해 염세적이고 열등감을 느끼고 부정적일 때가 종종 있는데 자신도 그것을 겪어봤다고 해서 이런 증상들을 호소하는 우울증 환자에게 너만 힘드냐 성의 발언을 하는 것 역시 심장에 꼽힌 칼을 마저 잡고 도려내는 짓이다. 비슷한 증상을 겪음에도 왜 하나의 병으로 또는 장애로 분류가 되었는지에 대한 당연한 의문을 가져야 하는 것이 순서이고 당사자나 의사처럼 체험과 지식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뭔가 일반적인 상황과 다른 것이 있구나’ 정도의 공감을 발휘한 채 대하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이런 점 외에도 정신의학분야의 역사가 육체를 다루는 의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역사가 많이 짧다는 사실을 안다. 일반적인 인식으로 정신 혹은 심리학을 떠올려보면 프로이트나 융 정도가 생각나지만 육체는 적어도 히포크라테스까지 내려가지 않는가. 그로 인해 빚어지는 긍정적인 면 부정적인 면, 주관적인 면, 객관적인 면 등을 포괄해서 일반적인 인식과 지식 자체에 대해 부족현상이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공감이나 이해가 결여되고 환자가 비난을 받을 정도로 짧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상대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은 공감과 이해의 깊이는 늘려주지만 그래야지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항상 우리는 결과에 대해 뭔가의 탓으로 돌리고 많은 것들 중 하나의 원인만을 특정해 놓아야 마음이 편해진다. 불확실한 것은 무섭고 불안하기 때문에. 그러나 세상의 인과는 그렇게 구성되지 않는데 병이라고 예외일까. 불확실함 속에 작은 분명함을 만들어가는 것은 치료의 삶으로서 역할을 하고 그것을 만드는 것은 개인적, 사회적 차원에서의 공감과 이해로 출발하지 않을까 하고 감히 말해본다. 나조차 잘하지 못하지만 기록이 안 좋다고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정신질환을 겪고 있는 입장에서 대변했지만 병이 아닌 인식과 싸우고 있는 무수한 분들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