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시 달리게 된 이유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

by 스미레


내가 이 책을 두 번째로 완독 했을 때쯤 나는 달리기를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첫 번째로 이 책을 읽었을 시기에 나는 달리기를 지금보다 잘했지만(내 기준 더 오랜 시간 빠른 속도로) 다소 의무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역도에서 달리기까지

그 당시 나는 역도와 바디 웨이트(맨몸 운동)를 주로 하며 근력을 강화하는 훈련 방식만을 고집했기 때문에 유산소 운동에 시간을 쏟는 것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체육관을 오고 가는 시간을 할애해 아주 적은 빈도로만 달렸다. 나의 운동방식을 고집하는 와중에서도 그나마의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한 행동에 불과했다. 이런 내가 왜 달리기를 나의 본격적인 메인 운동으로 다시 시작하고자 마음을 먹게 되었는지를 설명하자면 이전에 행해왔던 스트렝스 위주의 훈련을 왜 그만두게 되었는가부터 설명해야 한다.

근력 향상 위주의 훈련 방식을 좋아했던 기간은 내가 고등학생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던 시기부터 20대 초반까지(대략 23세 까지)였다. 그 이후로는 이런 운동방식을 그만두게 되었다. 어떤 계기로 단숨에 그만둔 것은 아니다. 그래도 크게 생각나는 이유를 들자면 이렇다.


첫째로는 성인이 된 후 직업이 생겼기 때문이다. 일단 직업을 구했을 때는 계약직이 아니라면 내 맘대로 그만둘 시기를 정해놓고 일을 하지는 않기 때문에 하루 중 운동에 할애하던 시간을 좀 본격적으로 또는 전면적으로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직업이 없을 때보다는 운동에 쓸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레 운동 종목의 가짓 수와 시간을 줄이게 된 것이다.

둘째로는 무거운 무게를 들고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고강도 훈련을 일과 함께 병행하는 것이 체력적으로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강도와 페이스를 체계적으로 조절해 일과 잘 병행해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 경우에는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때 당시만 해도 예전같이 못할 바에야 안 하고 만다 하는 심술궂은 마음이 있었다. 때마침 그동안 해왔던 훈련 방식에 정체기가 찾아와 점점 흥미를 잃어가고 있기도 했고 이런저런 걸 핑계 삼아서 어떻게든 ‘안 한다 ‘는 사실을 정당화하려고 애쓴 것 같기도 하다. 흥미가 떨어졌으면 받아들이면 될 것을 어린 마음에 꽤나 포장을 하려 노력했던 것 같다.

세 번째 이유는 나의 라이프스타일이다. 스무 살 후반부터 거의 4년 동안을 잦은 여행을 다니며 살았던 탓에 연중 생활패턴의 큰 시계가 그리 규칙적이지는 못했다. 이때의 4년은 거의 여행 자금을 대기 위해 일을 하고 있었다. 유럽과 일본, 국내 도시를 향해 자주, 그리고 불규칙적으로 떠났는데 이런 생활은 강제적으로 운동을 몇 개월씩 쉬게끔 만들었다. 여행지에서 돌아와 이미 패턴을 잃은 상태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귀찮음을 내가 견딜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2달 만에 운동을 다시 시작할 때는 2달 전의 컨디션과 퍼포먼스를 가지고 시작할 수는 없다.

네 번째는 함께 운동하던 사람들 때문이다. 이 운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옆에서 언제나 함께 했고 나를 응원해준 어른들(고등학생 때 들어간 동호회의 형님들인데 모두 삼촌뻘이다)이 있다. 내가 학생일 때는 동호회 회비도 받지 않고 밥도 사주시고 심지어 용돈도 쥐어주시던 감사한 형님들이다. 스무 살 초반까지는 함께 운동해서 좋았지만 그 이후로는 잦은 여행과 구직, 실직이 반복되는 나의 라이프 패턴 덕분에 몇 개월씩 보지 못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했다. 더군다나 그 당시 머릿속에는 여행 생각으로만 가득했다. 일과 여행을 핑계로 몇 주, 몇 개월 만에 만날 때는 내가 이곳을 필요할 때만 찾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운동으로 만났던 사람들이기에 운동으로 이어진 연결고리가 끊어져가는 상황에서 억지로 이어가고자 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이러한 네 가지 큰 이유로 인해 나는 운동을 그만하게 되었다.

'그 운동만 그만하고 다른 걸 하면 되지 왜 운동 자체를 그만두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자면 그 이후로도 집에 철봉을 설치하긴 했다. 그렇지만 정년퇴직을 한 사람이 타성에 젖어 이리저리 할 일 거리를 찾듯이 한 게 전부였다. 하고 있는 순간엔 예전 생각이 나며 기분이 좋아졌지만 다시 그때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상상되지 않았다. 쉽사리 다른 운동으로 취미를 옮기지 못한 이유는 그것 말고는 뭘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많은 시간을 쏟아왔던 것이기에 놓아주는 시간도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저런 심경과 환경의 변화가 일어나는 도중 나는 군 복무를 마쳤고 그와 동시에 코로나 전염병이 발생한 탓에 여행자 신분은 잠정적인 휴무 상태가 되었다.


궁극적으로 달리기를 다시 시작하기로 결정한 것은 군 복무가 끝난 직후 구하게 된 일 때문이다. 일을 시작한 지 1년쯤 지났을 때 뜻밖의 여러 불쾌한 일들을 겪음으로인해 나의 몸은 10분도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결국 그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귓속에 있는 균형을 담당하는 기관에 문제가 생기면 누워있어도 구토가 올라오고 일어서서 걸으려 하면 모든 것이 두 개로 보이며 땅이 솟구치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다. 3달 정도에 걸쳐 대학병원을 다니며 치료를 받았고 동시에 정신과 상담도 병행했다. 상담을 병행한 이유는 정신적인 괴로움 때문에 받은 피해를 오롯이 몸으로 소화해내다 보니 걸린 병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서서히 몸이 회복되고 몇 km쯤은 문제없이 걷는 것이 가능해졌을 때 문득 나는 다시 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워있던 것에서 이제 두발을 움직여 걸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 다음엔 달릴 일 밖에 더 있는가라는 오직 육체의 의사만으로 결정된 판결이었다. 급하게 잘라내어 단면이 고르지 못한 박스테이프 같은 상태로 회사를 나온 탓에 아직 남겨진 문제들이 많았고 어떤 감정으로 있어야 할지도 제대로 판단되지 않는 상태에서 나에게 남은 것은 그저 내쪽의 잘린 단면을 고르게 해서 다시 쓰일 때를 대비해 붙여놓는 일 밖에는 없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몇 시간을 내리 앉아서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은 달리기 시작하고 몸의 전반적인 컨디션이 올라오고부터 가능해졌다.


처음에는 불과 1km밖에 달리지 않았음에도 하루 종일 근육통에 시달렸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엔 그 거리를 5km까지 늘렸고 필요한 만큼만 근육의 피로를 느낄 정도가 되었다. 현재 달릴 때의 자세는 이전에 근력 운동을 할 때와는 사뭇 다르다. 그때는 단순히 '좋아서' 그 운동을 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행했고 '건강을 위해'서 하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좋아서 했지 필요해서 하지 않았다. 지금은(아직까지는) 달리기를 '좋아해서' 하지는 않는다. 달릴 수밖에 없고 내 상황에서 달리는 것이 하루 중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에 달린다. 역도나 맨몸 운동을 할 대 보다 운동의 강도는 현저히 떨어졌지만 오히려 마음가짐은 사력을 다하고 있다.


현재 나의 일상에서 달린다는 것은 기계의 코드를 꼽아 전원을 공급하고 올바른 초기 세팅값을 입력하는 과정과 같다. 달리지 않으면(적어도 밖에 나가 걷지라도 않으면) 지금의 나는 잠에서 깨어난 후 이성적인 생각 상태로 접어들기 힘들다. 자칫하면 아니 너무나 자연스럽게 편향된 감정의 늪에 빠져있기가 쉬운 상태이다. 나 자신을 깨우고 찾기 위해 달리는 것이 필요하다. 달림으로써 내가 나 자신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놓는 것이 중요하다. 기록의 향상이나 옆사람보다 빠르게 뛰게 되는 것은 아직 중요하지 않다. 아침에 일어나 달리러 나간 나 자신을 그저 칭찬한 후에 걷는 것보다 느리게 뛰게 되더라도 되도록이면 멈추지 않고 달리다 들어오는 것을 목표로 할 뿐이다.




소통 러닝

달리게 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의외로 몸이 아니고 정신이었다. 내 육체의 객관적인 상태 파악이 우선이엇지만 나의 정신은 자꾸 이전의 '건강했던 나 자신' 모드로 전환되었다. 그래서 달리기 초반에는 제자의 실력을 파악하지 못한 채 본인 기대에 충족하지 못한다고 하여 질책하는 스승과 같은 꼴을 반복했다. 기록 향상은 둘째치고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기대할 수 없는 정신상태로 달린 지 이주쯤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을 '했다'는 사실은 '안 한다’ 였을 때에 비해 내 몸의 컨디션을 한층 올려놓았다. 하지만 현재 내 육체가 발휘할 수 있는 수준에 상회하는 강도로 계속하다 보니 발목에 무리가 왔고 삼일 정도를 쉬게 되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이 기간 동안 머릿속에 떠다니는 욕심을 버리는 연습부터 하기로 했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걷는 것쯤을 운동이라고 할 수 있나'라는 자세로 임했다면 이제는 '현재 나에게는 걷는 것조차 강도가 있는 운동이며, 그렇기 때문에 한술 더 떠 달리기를 하겠다고 했으면 현재 몸상태에 맞는 명확한 페이스를 찾아야만 지속적으로 달릴 수 있다'라는 사실을 자신에게 계속 인식시켰다.

발목을 회복하고 다시 달리러 나간 날 '저 사람 뛰는 거야 걷는 거야?'라고 생각이 들만한 정도의 속도로 달렸다. 빠르게 걷는 아주머니들에겐 추월당했고 터벅터벅 걷는 사람보단 빨랐다. 열심히 발길질을 하면서 '예전엔 안 그랬는데', '예전 같았으면 벌써' 등의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에 찾아오기 시작했지만 무시하고 페이스를 유지했다. 그랬더니 이 주 전엔 평균 4번 정도는 쉬었다 갈 정도의 거리를 한 번도 쉬지 않고 왕복했다. 빠른 러닝과 휴식을 반복했을 때 보다 기록도 단축되었다. 뛰고 나면 관절과 근육에 분별없는 통증이 있었던 것이 이제는 무엇보다 정확히 '달릴 때 필요한 근육'을 잘 쓰고 돌아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루키의 달리기가 나에게 미친 영향

'어제의 자신이 가졌던 약점을 오늘 조금이라도 극복해나가는 것'의 중요성을 하루키는 강조하고 있다.

'남에게 지거나 실수하는 것은 괜찮다. 항상 이기기만은 할 수 없으니. 하지만 같은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는 것은 싫다. 그 안에서 어떤 형태의 교훈이라도 배울 수 있었으면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현재 내 상황을 정확히 관통하고 타개할만한 힘을 주는 말이었다. 삼 일간의 욕심 버리기 기간을 가지며 이 책을 읽었었다. 처음 책을 집어 든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던 첫 이 주간 너무 고통스럽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 근육통과 달릴 때의 지루함이 이것을 더 지속해야 하나 하는 의문이 멈추지 않던 찰나, 몇십 년 동안 거의 매일 아침을 달려오고 매년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했던 작가가 떠올랐다. 도대체 그는 '왜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을까'를 알고 싶었다. 하루키 달리기의 시작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 였다. 장기간 책상에 앉아 창작을 해야 하는 사람(하루키 자신)이 갖추어야 할 기본 교양을 체력이라고 보았다. 하루키의 삶은 ‘작가나 예술가는 일상이 주로 불건전한 것으로만 차있다’는 생각에 건전과 불건전의 공존으로 맞선다. 기계나 도구를 갈고닦는 것이 서툴다고 스스로 말하는 하루키의 성격에 러닝은 사이클 같은 것보다는 좀 더 적합한 선택지였다고 한다. 이 책에는 달리는 방법이나 비결 같은 건 나와있지 않다. 이 책은 걸린 제목처럼 달리기라는 것에 대해서 '내(하루키)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과 소설과 달리기에 대한 철저히 하루키적인 시선과 자세로 쓰였다. 장거리 러너라거나 나이가 듦에 관계없이 꾸준히 글을 쓰고 있는 사람들에겐 좀 더 공감할 수 있는 요소가 있을지 모른다.

책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위안은 하루키도 나처럼 서툰 러너였던 시절이 있었고 누구와 나름 견줄만한 마라토너였을 때도 있었으며 정체기가 찾아와 다른 운동으로 눈을 돌리기도 했던 그 과정 자체였다. 그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러너가 된 계기 본격 러너로써 활동했던 기간, 트라이애슬론을 하게 된 이유까지 글로써 서술된 시간 속에서 그는 철저히 자신의 말에, 자신의 몸에 귀를 기울이며 수없이 던져지는 삶의 질문지에 대한 선택을 내려왔다. '중요한 것은 시간과의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닌 42km를 얼마나 자기 자신에게 충족하며 달릴 수 있는가다'라고 그는 매일매일 자신에게 되풀이해 말했을 것이다. 러너로서의 그와 소설가로서의 그는 그가 마주하는 대상만 변경될 뿐 자세와 페이스에서 크게 다른 사람이 되지 않았다.


삼 일간의 휴식을 통해 결국 나는 '나의 러닝 페이스'를 찾았다. 지쳐도 다시 달릴에너지는 항상 샘솟을 것 같은 기분으로 달린다. 하지만 좀 더 그 과정을 깊게 들여다보면 이 책은 내가 처한 상황에 관계없이 '나의 페이스를 찾는 법'을 가르쳐 준 것이다. 혼란스러운 때일수록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먼저다. 그것은 힘이 되는 것은 둘째 치고서도, 남들의 평판은 차치하고서도 이 망망대해인 세상에서 강력한 노를 가진 사람이 되는 길이다. 나는 큰 배의 선원이 되는 것보다 나의 배를 내가 저어 가고 싶다.

짧다고 하기도 민망한 나이로 감히 말하건대 이제 까지 느껴온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의 가장 큰 단점은 내 뜻과 관계없이 나를 내가 아닌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관계가 너무 많아진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소음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개개인이 가진 내면의 목소리가 희석되고 혼란스러워진다. 그럴수록 사람은 앞에 놓인 선택에 대한 결단을 누구의 조언, 누구의 강연 같은 것을 등에 업고 하게 되기도 한다. 공감되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것이 답인 것 같지만 그 사람은 그 사람이 들었던 내면의 소리를 우리에게 말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강연자에게 그가 그의 목소리를 들었던 법을 배우면 된다.

동시에 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 누구의 공감도 지지도 얻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들이 보기에 그리 멋들어져 보이는 삶이 만들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남들과 차이 난다는 것 자체로 내가 무모하고 가치 없는 사람인 것 같이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그곳에는 적어도 '자신이 충족하는 삶', '자신만이 살 수 있는 삶'이 기다린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서 나타나는 가치는 개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그것을 누군가에게 드러났을 때 나와 비슷한 결의 사람을 만난다면 그것 또한 재미있을 것이다. 타인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이 전달하고 있는 핵심은 ‘나는 나만이 살 수 있는 삶을 살았다 ‘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항상 외치는 ’ 당신들도 할 수 있다’는 말은 ‘당신의 삶은 당신만이 살 수 있다 ‘인 것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그들의 성공’, 스토리’를 따라 하기보다는 그들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이어나가게 하는 그 장치가 무엇인지를 궁금해해야 한다. 자신과 대화를 더 수월하게 해 주어 삶을 한층 더 선명하게 해주는 트리거는 무엇인가? 그리고 당신은 어떤 계기로 그것을 알게 되었는가? 나는 나를 약하게 하는 것들만을 내 곁에 두어봄으로써 망가졌던 자신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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