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년이 온다 / 한강

by 박하 Bakha


집단화된 악

홀로코스트, 5.18, 4.3... 거대하고 비이성적인 폭력은 집단화된 악의 결과이다.

A 집단이 B 집단에게 저지른 폭력은 개인이 개인에게 폭력을 저지른 것보다 비교할 수 없는 고통과 희생자가 존재하지만, 폭력의 주체를 밝혀야 하는 단계에서는 실체가 없는, 허상의 악이 되어버리는 일이 많다. 그 집단 안에는 대표성 아래로 숨어버리는 수많은 실체가 있는 개인이 존재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이 그 일을 명령하거나 의도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 사건을 통해 언급한 '악의 평범성'과 같이, 다들 성실히 조직의 방향에 동조했을 뿐이라고, 권한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따라서 집단화된 악이 완전히 처벌받는 것은 현실 역사에서 불가능에 가깝다. 보복성 처벌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르는 양상으로 더 많은 무고한 희생만 낳았을 뿐, 정의롭게 심판받았다고 할 수 없다. 신적 존재가 징벌적 진멸 전쟁을 선포하지 않는 이상은, 죄의 대가는 이승에서의 심판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렇게 거대한 악은 역사 속에서 다른 이름으로 수없이 반복되고 있다.


현대의 집단화된 악은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가?

자본주의 사회의 거대 기업, 공공기관, 집단화된 (거의) 모든 권력화된 조직들…

과거 나는 의미를 상징화하는 브랜드를 만드는 나의 직업이 자랑스러웠다. 상징체계에 담는 기의는 대부분 좋은 가치들(일 수밖에 없는)로서, 그것을 여러 소통 접점에서 조화롭게 기표화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한 조직을 그런 가치들로 이끌 것이라고,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이 선한 일이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브랜딩 컨설턴트는 그것을 실제로 운용하는 주체가 아니기에 기획했던 대로 구현되지 않는 결과에 실망하기도 하고, 어쩌면 비즈니스의 현실적인 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이상적인 기획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서 스타트업에서 인하우스 브랜더로 조직생활을 시작했다. 조직 생활에서 제일 처음 깨달은 것은,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조직의 인지도가 높아지면 자연스레 권력이 발생되고, 그 결과 집단 내에 도그마가 아주 쉽게 생겨나며 조직을 스스로 갉아먹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현실 비즈니스(조직 운영)는 이상적인 기획처럼 단순하지 않은, 굉장히 복잡한 사회 구조 안에서 얽힌 생존게임이기에, 죽지 않기 위해 표방하는 가치를 일정 부분 타협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가치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향하는 것 - 바로 그 균형감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문제는 그 균형감이 독단적이고 조직의 개인들 안에서 합의되지 않은 결정들로 쌓여가게 되면 조직원은 노동자로 전락하고, 그들의 노동은 소외되는 결과를 낳는다.

조직 내부가 그렇게 경화되어 간다면, 외연에서는 거대해져 가는 집단의 이름 - 브랜드라 불리는 - 은 마치 실체가 있는 하나의 존재처럼 대중과의 접점에서 소통한다. 조직이 그 이름(브랜드)이 표방하는 가치에 걸맞게 행위할 때는 오히려 그 상징체계는 강력해지지만, 반대의 경우나 책임을 져야 하는 불상사에서 그 이름은 쉽사리 숨기 좋은 허상의 그림자가 되고, 모순적인 방향성에 대해 말장난을 하며 무마시키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런 현상들 안에서 자기혐오와 허무함을 느꼈다. 내가 만드는 상징체계가 거짓이고, 표현되는 언어와 이미지는 거짓을 가리는 속임수라는 생각이 들자 자기 분열이 일어나는 듯했다. 나의 이상주의와 나약함이 한몫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나 자신에게조차 더 이상 떳떳할 수 없었다. 내 손에 피가 묻어 지워지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처럼 공정성에 예민한 사회에서 적어도 기업은 최악의 경우 존속이 어려워지거나 막대한 손해를 보기도 하지만, 공공기관은 그 대표성 안으로 모든 것을 소거시켜 버릴 수 있기 때문에 더 강력한 폭력을 발생시킨다. 그 죄를 짊어질 대표자를 처단하고 금전적 보상이 이루어지면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사건이 마무리된다. 그렇게 피해자들의 고통은 영원히 소거되지 않는다.


해갈될 수 없는 살아남은 자들의 죄책감

<소년이 온다>는 5.18 도청에서 살육당한 시민들 중 한 명이었던 동호라는 중학생을 중심으로 그 아이와 당시의 살육의 기억을 가진 자들의 고통스러운 삶이 이어지는 이야기다. 살육의 그악스러움과 대비되는 작가의 관점과 문체가 너무나 섬세하고 여려서 더 고통스럽다.


채머리 떠는 노인의 얼굴을 너는 돌아본다. 손녀따님인가요. 묻지 않고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기다린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적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45p. 1장 - 어린새


당신의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99p. 3장 - 일곱개의 뺨


집단화된 살육 안에서 살아남은 피해자들의 고통만 이어지고 있었다. 그 일을 명령하고, 그 명령에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은 어찌되었는지 알 수 없다. 친일 세력이 또 다른 권력으로 이어졌던 것처럼, 시대가 전환되어도 폭악자들은 동일한 인물이고 동일한 얼굴과 행태를 드러낸다. 작가의 기록처럼, 어떤 무장군인은 일부러 총을 허공으로 겨누었다 하는데, 어쩌면 그런 사람들 또한 폭력적인 명령을 받은 희생자이기도 하다. 성 고문을 당한 여공의 기억에서도 그 일을 저지른 개별 행위자가 존재했지만, 그들의 신념 안에서 그 폭력은 정당하고 오히려 영웅적 행위이기까지 하다.


죄책의 고통은 마지막 장, 동호 어머니의 독백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꼬박 사흘 그렇게 열기가 남았었는디 결국 아스팔트가 식어버렸다이. 섭섭할 일도 아닌디 섭섭했어야. 아까 점심 먹고도 한참 그 위에 서서 기다렸다이. 식어버렸다 해도 거그가 조금은 더 따땃한게. 그라고 지켜서 있다보먼 네가 훌훌 지나갈지도 모른게.
180p. 6장 - 꽃 핀 쪽으로
가끔은 말이다이, 내가 뭣한다고 문간채에다 사람을 들였을까....... 생각한다이. 그까짓 사글세 몇푼 받겄다고...... 정대가 이 집으로 안 들어왓으면 네가 정대 찾는다고 그리 애를 쓰지 않았을 것인디....... 그라다가 느이 둘이 배드민턴 침스로 웃던 소리가 생각나면, 죄 받제...... 죄 받아, 그람스로 고개를 흔들어야. 그라제, 내가 그 불쌍한 남매를 원망하먼 큰 죄를 받제.
187p. 6장 - 꽃 핀 쪽으로
어쩌끄나, 내가 서른살에 막둥이 너를 낳았는디. 나는 타고나기를 왼쪽 젖꼬지 모양이 이상해서, 느이 형들은 잘 나오는 오른쪽 젖만 빨았는디. 내 왼쪽 젖은 퉁퉁 붓기만 하고 애기들이 빨지 않아서, 보드라운 오른쪽 젖하고 딴판으로 단단해져버렸는디. 그렇게 흉한 짝젖으로 여러해를 살었는디. 허지만 너는 달랐는디. 왼쪽 젖을 물리면 물리는 대로, 이상하게 생긴 젖꼭지를 순하디순하게 빨아주었는디. 그래서 두 젖이 똑같이 보드랍게 늘어졌는디.
어쩌끄나. 젖먹이 적에 너는 유난히 방긋 웃기를 잘했는디. 향긋한 노란 똥을 베 기저귀에 누었는디. 어린 짐승같이 네발로 기어댕기고 아무거나 입속에 집어넣었는디. 그러다 열이 나면 얼굴이 푸레지고, 경기를 함스로 시큼한 젖을 내 가슴에다 토했는디. 어쩌끄나. 젖을 뗄 적에 너는 손톱이 종이맨이로 얇아질 때까지 엄지손가락을 빨았는디. 온나, 이리 온나, 손뼉 치는 내 앞으로 한발 두발 걸음마를 떼었는디. 웃음을 물고 일곱걸음을 걸어 나헌테 안겼는디.
191p. 6장 - 꽃 핀 쪽으로


젖먹이 아기를 키우는 지금 시기에 소설을 읽어서 이 부분에서는 자꾸만 목이 메어왔다. 내 아기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자꾸 왈칵왈칵 올라왔다.


6장에는 동호 어머니의 눈으로 바라본 첫째 둘째 형이 등장한다. 사건 이후 몇 해가 지나 두 아들은 큰 싸움을 한다. 그 이후 두 사람은 서먹하지만, 어머니에게 다정한 첫째 형은 '흔적 없이 밝게 지낸다'. 아무래도 둘째 형의 울부짖음이 엄마 기억 속에도 메아리치는 것 같다. "형이 뭘 안다고... 서울에 있었음스로.... 뭘 안다고..." 그렇다. 그 곳에 없었던 첫째 형은 도저히 공감해줄 수 없는 고통의 무게가 둘째 형을 짖누르고 있다.

5.18을 경험하지 않았던 우리 세대는 어쩌면 모두 첫째 형인지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런 것 같다. 동생을 잃은 일이 충격적이고 믿을 수 없는 경악스런 사건이고 고통이지만, 그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 있었던 자들에게 채근한다. 나도 뉴스나 역사책으로 전해듣는 사건들, 과거에서 비롯된 현재의 병폐에 대해 부모 세대를 채근하고 비판한 일이 대부분이었다.

이번 계엄 사태를 경험하며 엄마와 잠깐씩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정치적 이야기는 최소화하려고 하지만) 일제 시대를 살았던 외할아버지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엄마가 한마디 하셨다.

"너거는 모른다... 그때를."

그렇다. 난 모른다. 아무것도.


<소년이 온다>에서 5.18의 고통은 죽음을 당한 희생자의 원혼으로, 생존자의 파괴된 영혼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마지막 문장들은 그 죽은 혼들이 생존자를 위로하는 듯 느껴졌다.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끌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192p. 6장 - 꽃 핀 쪽으로

더 이상 자책하지 말고, 양지로, 꽃이 핀 곳으로, 생으로 나아가라고. 못 이기는 척 그렇게 가라고.

그렇다. 그들의 죄책감을 덜어줄 수 있는 것은 죽은 혼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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