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 기쿠지로의 여름

우리의 여름

by 나경



안녕하세요. 나경입니다.


「기쿠지로의 여름」을 보기 위해 독립영화관 ‘소소아트 시네마’에 다녀왔어요.

대전에는 세 곳의 독립 영화관이 있어요. 대전아트시네마, 소소아트시네마, 씨네인디유. 곧 걷기 좋은 계절이 시작되니, 산책 겸 다녀오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요즘은 책을 읽거나 영상을 볼 때 집중이 쉽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스크린 앞에 앉아 오롯이 집중했던 시간이 참 즐거웠어요. 영화를 보고 나오며 새삼 ‘아, 이래서 극장에 오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기쿠지로의 여름」은 영화도 OST도 참 유명하지요. 저는 영화를 보고 난 후, 히사이시 조의 음악을 며칠째 반복해 듣고 있어요. 혹시 편지를 읽고 계신 지금, 음악이 궁금하시다면 편히 이야기해 주세요. 머무시는 동안 들으실 수 있도록 준비해 둘게요.


영화의 줄거리를 짧게 이야기해 볼까요.

도쿄에 사는 마사오는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어요. 여름방학이 되자 친구들은 모두 가족과 함께 휴가를 떠나고, 함께 놀 친구가 없는 쓸쓸한 마사오는 우연히 엄마의 주소를 찾게 됩니다. 엄마는 일을 하러 멀리 떠났다고만 들었거든요. 마사오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림일기장과 방학 숙제를 배낭에 넣고 무작정 엄마를 찾아 떠나기로 마음먹습니다. 하지만 여행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어요. 불량배들에게 돈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마사오를 이웃 아줌마와 아저씨가 발견하게 되죠. 아줌마는 전직 야쿠자인 자신의 남편에게 마사오와 동행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렇게 9살 마사오와 52세 철없는 아저씨 다케다의 여름 여행이 시작돼요.


그런데 이 다케다 아저씨, 정말이지 철딱서니가 없어요. 아내에게 받은 교통비로 경륜장에 가서 도박을 하고, 택시를 훔쳐 달아나고, 호텔 요금을 내지 않고 도망치고, 음식을 훔치기도 하고요. 이렇게 적기만 해도 어질어질한 다케다의 행동에 어이없으면서도 이상하게 맥없이 웃게 되더라고요.

(물론 흐린 눈으로 보아야 했던 장면과 대사들도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영화라는 걸 감안하며 조심스레 보았어요.)


큰 반전 없이 영화는 한여름 햇살처럼 느릿하게 흘러갑니다. 여행길에서 만난 다양한 어른들이

마사오를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애쓰는 모습들, 초반엔 울상만 짓던 마사오가 시간이 갈수록 자주 웃는 모습도 반가웠어요. 처음엔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다케다 아저씨가 마사오의 여름에 함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즈음, 121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이 훌쩍 지나가 있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자신의 집을 향해 달려가는 마사오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밝게 웃고 있던 마지막 장면에서야 저도 마음을 놓고 조금 울었습니다. 마사오가 이번 여름에 겪은 일들과 앞으로 그가 어른이 되기까지 마주할 수많은 여름을 생각하니 문득 먹먹한 마음이 밀려오더라고요.


일본에서는 1999년에, 우리나라에서는 2002년에 개봉했다고 하니 지금쯤 마사오도 어른이 되었겠지요? 마사오도 그리고 이 글을 함께 읽고 계신 00님도 이 여름을 지나오느라 애쓰셨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요.


제철을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만 이번 여름은 정말이지 지독하게 더워서, 계절의 한복판에 있을 때는 ‘여름’이라는 말조차 꺼내기 힘들게 느껴졌어요. 하지만 늘 그렇듯, 지나고 나면 또 그리운 순간들이 있을 거예요. 영화를 보던 날은 마침 입추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거짓말처럼 시원한 바람이 불었어요. 히사이시 조의 음악을 들으며 동거인과 손을 잡고 기분 좋은 산책을 했습니다. 아마도 그 저녁은, 앞으로 제가 오래도록 그리워할 여름의 한순간으로 기억될 것 같아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4년 9월, 한쪽가게 나경 드림.


「나경의 편지」는 읽는 사람을 위한 작고 조용한 공간, 한쪽가게를 예약제로 이용해 주시는 분들께 드리는 저의 작은 마음입니다. 소박한 일상을 살아가며 마주한 생각과 마음, 책방의 이야기, 읽은 책 속 문장, 짧은 일기와 낙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