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cleus 2025 #6
중학생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까지 종종 연락을 하곤 했다.
하루는 친구들과 함께 치킨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의대를 가기 위해 재수를 하는 친구와 이미 대학을 간 친구, 그리고 대학은 갔지만 우울증으로 질병 휴학 중인 나, 이렇게 3명이 모였다.
친구들은 학교에서 있었던 웃겼던 일, 힘들었던 일,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는데 순간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이 띵- 했다. 우울증으로 물들어버린 내 일상은 온통 부정적인 생각들과 죽음, 자해, 고통, 연민 같은 것들 뿐이었는데 친구들의 이야기는 뭐랄까... 조금 더 "살아있는" 이야기들이었다. 마치 내가 살던 세상과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기분이 들었다. 괜히 내가 하던 끔찍한 생각들을 이야기했다가 나를 부정적인 생각에 잠식당한 사람으로 볼까 두려웠다. 그래서 내 이야기를 하면서도 "근데 지금은 괜찮아"라는 말을 마지막에 꼭 덧붙였다.
친구 중 한 명이 나에게 물었다.
"혜성아, 근데 복학은 언제 할 거야? 이제 괜찮아진 거면 슬슬 해야 하지 않아?"
"어?.. 어어,, 그렇지."
하고 대답하면서도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지금도 괜찮지 않아.'
그 후로 1년이 지났을 즈음, 재수를 하던 친구는 의대생이 되었고 나머지 한 명은 대학교 2학년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우울증의 늪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오히려 더 깊숙이 빠져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대학"이 아닌 "대학병원"에 꼬박꼬박 출석했고 평범한 대학생의 일상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져 갔다. 어쩌다 보니 대학병원의 기숙사..에 입소, 아니, 입원하게 되었고... 야속하게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정신을 차리고 일상으로 돌아와보니 친구들은 전부 취준생이 되어있었다. 아직 1학년 1학기도 마치지 않은 나를 향한 걱정의 눈초리들이 너무 따가워서 점점 움츠러들었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꿈이 있었다. 그동안 오랜 시간을 병원에서 지내면서 나에게도 의사라는 꿈이 생겼다. 나를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준 교수님과 레지던트 선생님들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삶의 희망이 되어주고 싶었다. 덕분에 새로 얻은 목숨, 누군가를 살리는 데에 쓸 수 있다면 그보다 값진 삶은 없을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의대를 가기 위해 다음 해 수능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서 보게 된 올해 수능, 결과는 아쉬웠다.
객관적으로 작년과 올해 수능 성적만 놓고 보면 기적에 가까운 성적 상승을 이루어냈지만 의대에 갈 성적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내년까지는 도전해 보기로 했다. 가능성이 보이는데 기회를 한 번만 주기엔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하니까. 현재 교육과정의 마지막 수능인 내년을 끝으로 의대에 가지 못한다면 그땐 진짜 다른 길을 찾아 나서야겠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정말 과정에 대한 아쉬움 없이 올해를 불태운 만큼 내년에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게 두렵기도 하고 다시 한번 주어진 기회에 설레기도 한다. 과연 내년 이맘때의 나는 울고 있을까, 웃고 있을까. 궁금하면서도 마침표를 찍기 무서운 그런 복잡한 감정이다.
분명 나는 잘 해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불분명한 미래에 불안할 때면 꼭 생각나는 친구가 있다. 내가 의대를 가기 위해 수능을 다시 준비한다고 했을 때 나에게
"재수면 모를까, 지금 다시 수능을 준비하기엔 너무 늦지 않았어? 그러다가 의대 못 가면 시간만 버리고 뒤처지기만 할 텐데 안 불안해? 나 같으면 그냥 복학한다. ㅋㅋㅋㅋㅋ"라며 아픈 말을 하던 너.
자존감이 바닥인 채 별 기대 안 하고 봤던 멘사 시험에 합격해서 자랑했을 때 나에게
"근데 멘사 들어가면 좋은 게 뭐야? 취업에 도움 되나? 에이~ 뭐야, 대단한 줄 알았는데 별거 아니었네."라며 무안하게 만들던 너.
요즘 인스타 스토리 보니까 주변에 사람들도 많고 잘 놀러 다니고 열심히 살더라. 너는 알까, 너의 대수롭지 않은 한 마디가 1년 내내 나를 괴롭혔다는 사실을.
너 말대로 내가 똑똑한 머리로 멍청한 삽질하고 있는 건가 싶어서 때론 두려웠어. 그래도 이제는 나를 믿어. 어차피 긴 인생, 몇 년 느리게 출발한다고 뒤처지는 건 아닐 테니까 나는 내가 선택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거야. 누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 나한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게. 너는 너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면 그땐 반갑게 인사하자.
오늘도 머릿속에서 그 친구에게 편지를 한 통 보낸다. 직접 말할 용기는 없으니까.
사실... 너의 스토리를 볼 때마다 괜히 질투가 나. 말은 번지르르하게 해놓고 괜찮은 척 하지만 나도 당장 내일이 두려워. 마치 눈을 감고 걷는 기분이야. 당장 앞이 낭떠러지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나는 아직도 외로운 수험생인데, 너는 사람들 속에서 웃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게 생각보다 많이 비참하더라. 이미 너의 아픈 말이 틀렸다는 걸 충분히 증명했다고 생각했는데 너만 보면 이상하게 또 초라해진다. 분명 그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건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