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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빌어먹을 인생을 나라도 연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Nucleus 2025 #5

by 혜성


"자기연민" —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의 위로


우리는 흔히 '자기연민'을 '피해자 코스프레'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누군가가 "걔는 자기연민이 좀 강해."라고 말한다면 "걔는 늘 과도하게 억울해하고 스스로 피해자라고 생각하더라." 정도의 뜻일 것이다.

또, 혹자는 말한다. "자기연민에 빠지면 인생이 불행해집니다. 왜곡된 시선으로 인생을 바라보게 되니까요."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내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한다. 적어도 남들한테 보일 때만큼은 말이다.

나도 그들과 같았다. 그날 신경과에 가기 전까지는.


수능 전 마지막 평가원 모의고사인 9월 모의고사 단 5일 전 이야기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에 눈을 떠 세수를 하고 학원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왼쪽 눈이 조금 뻑뻑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얼른 마저 챙긴 후 학원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등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눈을 깜빡일 때마다 주변 피부가 아픈 느낌이 들었다.

'요즘 너무 무리했나? 피곤하긴 하네. 9모 끝나고 잠을 좀 푹 자야지'

정신없이 공부를 하고 있는데 왠지 아픈 부위가 점점 넓어지는 것 같았다. 그로부터 6시간 정도 동안 눈에서 시작된 통증은 왼쪽 얼굴 전체로 퍼졌다.

근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신기할 정도로 얼굴을 코 기준으로 반 갈랐을 때 왼쪽만 아팠다. 꼭 선이 그어져 있는 것 마냥 가운데를 경계로 왼쪽은 건들 수 없을 정도로 아려왔고 오른쪽은 눌러도 멀쩡했다.

통증은 점점 심해졌고 영역은 딱 안면, 그 밖으로 퍼지진 않았다. 손으로 일으킨 작은 바람에도 피부가 아렸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주변 피부를 사시미 칼로 포 뜨는 것만 같은 아픔이 느껴졌다. 타이레놀이라도 먹어보면 진통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2번이나 먹어봤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해서 통증은 심해지고 급기야 두통이 생겼다. 저녁쯤에는 눈을 깜빡이는 것도 고통스러워서 새끼손가락으로 왼쪽 눈을 덮은 채로 공부를 했다.

그다음 날에도, 다다음 날에도 통증은 여전히 있었지만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도저히 시간을 내서 병원에 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4일 차 아침이 되어서야 통증이 더 악화된 걸 보고 동네 내과에 들러 진통제라도 받아서 등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별생각 없이 여느 때처럼 등에는 무거운 등딱지를 이고 병원을 갔다.


내 증상을 유심히 들으시던 의사 선생님께서는 얼른 신경과로 가봐야 할 것 같다며 진료의뢰서를 써주셨다. 정확히 어떤 질환이 의심되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 뒤에 돌아올 답변이 두려워서 더는 묻지 않았다. 시신경염 진단을 처음 받았던 날이 아찔하게 떠올랐지만 정신을 겨우 붙잡고 가장 가까운 신경과를 찾아봤다. 운 좋게 지금 오면 바로 진료 볼 수 있다는 병원이 있어 택시를 타고 서둘러 신경과로 향했다. 의뢰서와 내 병력, 증상을 들으시더니 "이마에 주름 잡히게 해 보세요, 입꼬리 올려보세요"와 같이 간단한 검사를 하시고는 우선 안면마비는 아니라고 하셨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선생님께서는 믿기 힘든 말씀들을 와다다 쏟아내셨다.

지금 환자 분이 말씀하시는 증상들과 검사 결과를 종합해 보면
5번 뇌신경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얼굴 쪽으로 내려오는 감각을 수용하는 말초 신경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보이고,
만약 며칠 내에 자연 치유되지 않으면 삼차신경통을 의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상황에 따라 뇌 MRI나 다른 정밀검사가 필요할 수 있고 간질약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최악의 경우 개두술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토가 쏠렸다. 시신경염도 모자라 뇌질환이라니. 믿고 싶지 않았다.

사실 며칠 전에 GPT한테 내 증상을 알려주고 뭐 때문인 것 같냐고 물었을 때 삼차신경통이라는 생소한 답변을 하기에 미리 찾아봤던 질병이었다. 시신경염만큼 희귀한 건 아니지만 일상이 불가능할 정도의 악명 높은 만성적 통증이 특징이고, 암 조직이나 부종이 신경을 눌러 생기는 경우도 있으나, 다행히 암이 아니더라도 동맥이 신경을 누르는 등의 까다로운 상황을 동반하며, 근본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신경을 차단하거나 개두술을 해야...

젠장, 내 병신 같은 인생 또 지랄이다.

대체 인간은 어디까지 아플 수 있는가. 죽을병이라거나 시한부인 건 아니지만, 이렇게 다양한 과의 희귀 질환과 만성 질환들을 이 나이에 모두 가지는 사람이 흔치 않다는 건 분명했다. 어쩌면 당당히 아플 수 있는, 나의 상황을 정당화할 수 있는 아픔이 되기엔 부족해서 더 잔인한 걸지도 모른다. 이럴 거면 차라리 크게 하나 달라고 울부짖던 때도 있었으니까.

그 와중에 머릿속에서는 "어? 5번 뇌신경? 생명과학 시험 범위에 나오는 그거? 뇌신경 12쌍, 척수신경 31쌍! 이름은 뇌, 척수 들어가도 중추 신경계가 아닌 말초 신경계.. 와! 이제 이것도 당뇨병에 이어 까먹을 일은 없겠네" 분위기 파악 못한 공부 머리도 조잘대고 있었다.


삐---------------------


이명이 들리다 정신을 차리니 이미 밖이었다. 세상이 너무 고요했다. 조용하고, 또 어두웠다. 바람에 찢기듯 아픈 살갗을 부여잡고 학원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9월 모의고사가 바로 코앞이니 학원으로 가고 있긴 했지만 마음은 이미 붕 뜬 지 오래였다. 어쩌면 이대로 갑자기 신호 위반을 하는 차에 치이는 편이 덜 추잡한 마무리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걸었다. 학원에 도착해서 담임 선생님께 덤덤한 척 이야기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뇌신경 말초 신경인 거 안 까먹겠죠? 안 그래도 당뇨병 관련 문제는 그냥 제 상황 대입하면 되니까 남들보다 쉽게 푸는데, 신경 파트도 이제 편하게 풀겠네요. 오예! 올해 수능에 나오면 좋겠다!"라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연신 하며 교무실을 나왔다. 그렇게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그 많은 선생님들의 동정 어린 눈빛에 지지 않으려는 나의 발악이었을지도 모른다.

분명 내 다리는 터벅터벅..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머리를 박고 공부를 하는 뒷모습들을 지나 내 자리로 가는데 왜인지 내 마음은 신경과에 놓고 온 기분이었다. 육신은 있는데 붕 뜬 느낌이랄까. 내가 말하는 것 같지 않고, 내가 걷는 것 같지 않았다. 갑자기 일상이 낯설게 느껴졌다. 자리에 앉아 어제까지만 해도 지겹도록 봤던 책들을 펼쳐 보는데 이상하리만큼 이질적이었다. 이제 와서 짐작하기로는 위태롭고 격정적이었던 아침의 사건들, 뒤숭숭한 내 상태와 정반대로 아주 정적이고 종이 넘기는 소리조차 크게 들릴 정도의 숨 막히는 고요함만이 존재하는 학원이 대비되어 괴리감이 느껴졌던 것 같다. 당시에는 내 감정이 어떤 감정이라고 정의 내리지 못한 채로 어지러운 마음을 애써 달래며 차분하려 노력했다. 이유 모를 눈물이 나는데 당장 눈앞에 해야 할 공부들이 눈에 밟혀 양쪽 코에 휴지를 꼽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렇게 집요하고도 독하게 10시까지 꿋꿋이 공부했다.


그 광기 어린 독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우니 참고 있던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눈물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너무 아프고 쓰라려서 더 눈물이 났다. 울다 자다 울다 자다 그 이후 며칠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뭔가 충격적인 장면을 모자이크 처리하듯이 기억 일부분이 블러 처리된 느낌이다.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생활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굉장히 오랜 시간을 나 자신을 연민하는 데에 썼던 것 같다. 내가 보는 나의 인생이 너무나도 안쓰럽고 불쌍해서 울지 못하는 내 마음을 대신해서 계속해서 울었다.


시험 기간에 갑자기 허리디스크로 걷지도 못했던 기억.
그 와중에도 공부는 하겠다고 책을 스캔해서 옆으로 누운 채 태블릿에 문제를 풀던 기억.
팔을 어중간하게 들고 글씨를 쓰는 게 너무 힘들어서 한 문제 풀고 팔을 내렸다가 다시 한 문제 풀곤 했던 기억.
만성피로로 매일 코피를 흘리다가 우연히 들른 한의원에서 심장이 이상하게 뛴다는 소견과 한약보다도 내과를 먼저 가서 피검사를 해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
하루아침에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지방간을 전부 진단받고 대학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소견을 들었던 기억.
간수치가 심하게 높아서 이 정도면 기형이거나 암이 있을 수 있다며 얼른 초음파를 찍어보라는 소견을 들었던 기억.
급하게 내원한 대학병원에서 진료실에 들어가자마자 교수님이 "오늘 입원하시죠"라고 말씀하셔서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던 기억.
매일 8번씩 손을 따며 혈당 체크를 하느라 손 끝에 작은 점 같은 자국들이 징그럽게 새겨졌던 기억.
중요한 고2 내신을 열흘정도 앞두고 당일 입원을 하며 학교 선생님들께 영상으로라도 할 수 있으니 세특 활동 어떻게든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던 기억.
온갖 아기들의 울음소리와 핑크퐁 소리가 난무하는 6인실에서 식판을 펼쳐놓고 플래시를 들고 공부하던 기억.
입원으로 시험을 아예 응시하지도 못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몇 년간 준비해 온 수시를 버려야 하나 싶어 심란했던 기억.
뚝뚝 떨어지는 성적과 쭉쭉 올라가는 혈당을 보며 무기력했던 기억.
긴 유병 기간이 가장 큰 요인이라는 합병증인 당뇨병성 망막병증 초기를 1년 만에 진단받으며 언젠가 내 눈이 멀겠다는 생각에 두려워했던 기억.
죽고 싶어서 온갖 방법을 찾아보고 n번째 유서를 쓰며 이번엔 꼭 끝내리라 다짐했던 기억.
마지막 노력이라 생각하고 처음 갔던 정신과에서 첫날 바로 중증우울증과 불안장애를 진단받았던 기억.
스스로도 정서가 불안정한 편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경계선 인격장애라는 진단을 받고 인터넷에 찾아봤을 때 '무조건 피해야 하는 사람 유형'이라는 수많은 이야기에 상처받았던 기억.
처음 자살 시도를 했던 기억.
약물 과다 복용으로 응급실에서 위세척하던 몽롱한 기억.
난생처음 구급차에 탔는데 구급대원 분이 잠들지 말라며 계속 깨우시던 흐릿한 기억.
개방병동에 입원해서 해가 바뀌는 걸 보며 불안해했던 기억.
매일 2~3개의 필요시 주사를 하고서야 버틸 수 있었던 기억.
부모님께 죄송해서 열심히 모았던 돈의 거의 전부를 병원비에 보탰던 기억.
가장 유명하다는 대학병원 두 군데에 입원했었지만 끝끝내 맞는 약을 찾지 못하고 교수님께 해볼 수 있는 약물치료는 다 해봤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
차라리 임상 시험약이나 TMS, ECT를 해보자고 권유받았던 기억.
TMS를 하고서도 진전이 없어 ECT밖에 답이 없다며 퇴원을 권유하던 교수님께 그냥 여기 더 있으면 안 되냐고 빌던 기억.
퇴원하고도 몇 달 동안 일주일에 4일은 응급실에서 밤을 지새우던 기억.
폐쇄병동에 입원했지만 딱히 해볼 수 있는 게 없다는 소견으로 며칠 만에 퇴원했던 기억.
그 후 오랜 기간 매주 상담을 하며 많이 호전된 몸과 마음으로 도전한 수능이었는데 어김없이 혈당이 300까지 올라가며 관리되지 않아 스트레스받았던 기억.
겨우 정신 붙들고 공부하려 하는데 뜬금없이 시신경염이라는 희귀병을 얻었을 때 이제 진짜 내 눈이 멀겠구나 싶어서 펑펑 울던 기억.
눈을 쉬게 해야 하는데 우느라 정신없는 나를 지켜보던 엄마가 같이 우시며 당신 눈이라도 주겠다고, 근데 기능이 형편없어서 이건 줘도 도움이 안 될까.. 하고 말씀하시는데 억장이 무너지던 기억.


최근 몇 년간 겪었던 모든 절망스러운 순간들을 굳이 들추어냈다. 눈 앞머리가 찢어져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많이, 그리고 자주 울었다. 그냥 그게 나의 애도 방식이었다. 죽은 나의 마음을 애도하는 방식.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나의 영혼을 위한 위령제랄까. 마음껏 슬퍼하지 않으면 내가 더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서 힘껏 슬퍼했다.


앞서 서두에서 말했듯 남들이 보는 나의 자기연민은 피해의식에 찌든 과대망상일지도 모르겠다.

어떨 땐 나도 내가 어쩌면 피해망상 환자가 아닐까, 사실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사는데 나만 오버하는 건 아닐까, 나 스스로가 자기연민에 쩔은 패배자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빌어먹을 인생을 나라도 연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디 가서 억울하다 이야기하지 못하고, 떳떳하지 못한 아픔들이 너무 버거워서 정말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나 죽고 싶어 했지만 사실은 살고 싶었나 보다.


필히 이번 생은 형벌이리라.

늘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뭐가 좋다고 이렇게까지 아득바득 살고 싶은 지 모르겠다. 형벌일지라도 끝까지 살아보겠다는 일종의 반항심일까. 아니면 이마저도 망상인 것일까.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한테 "자기연민"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의 위로'였다는 것이다.


연민은 패배가 아니라 생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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