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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미나리와 함께 기필코 행복해지기

by 채움



고백하자면, 지난 3주는 밥보다도 미나리를 더 많이 먹은 것 같다.

가만히 있어도 풍기는 미나리 내음에, 입 안에서 봄이 너울너울 춤을 춘다.





#1.

문제의 미나리 다섯 단.


집에 미나리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약 3주 전, 의문의 택배 상자가 도착하면서부터였다.

택배를 열었더니 전날 주문한 미나리가 들어있었는데, 그 아래로 무언가가 후드득 떨어졌다.


하나. 둘. 셋. 넷. 응?

상자 안에는 다섯 단의 미나리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새벽 배송으로 주문했기에 아침에 프레시백을 열면 미나리가 모습을 드러냈어야 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오후에 택배 상자라니.


남편은 "이제 우리 미나리 장사 시작하는 거냐"며 깔깔 웃기 시작한다.

아, 웃지 마! 잠깐만!

급히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구매 기록엔 두 눈을 씻고 봐도 미나리 다섯 단이 틀림없었다. 아마도 장을 볼 때 재료들을 취소했다가 다시 담는 과정에서 수량이 합쳐진 모양이었다.

끝까지 확인했어야 했는데 이제와 누굴 탓하랴. 그럼에도 자잘한 실수가 나를 옥죄어 사람을 자꾸만 작아지게 만든다.




#2.

그만, 여기까지.

셀프디스에 가까운 자아성찰은 지금의 상황을 해결하는데 1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깟 미나리가 뭐라고 땅굴을 파게 해. "날씨야, 아무리 추워봐라. 내가 옷 사 입나 술 사 먹지"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미나리야, 아무리 많아봐라. 내가 버리나. 양껏 먹어주지.


본격 '미나리 뿌시기 프로젝트'에 들어가기 전, 다섯 단을 모두 소화하기엔 미나리 한 단의 위압감이 어마무시했다. 가까이 사시는 시부모님께 미나리 두 단을 드리고, 남은 세 단으로 여러 음식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가장 만만한 건 아이 이유식. 미나리는 봄의 제철 재료라 아이가 먹기에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게다가 미나리가 가지고 있는 뜻이 좋지 않은가!

미나리는 예로부터 '근채삼덕(芹菜三德)'이라 불렸다.

속세를 상징하는 더러운 물속에서 때 묻지 않고 싱싱하게 자라는 굳건한 심지, 음지라는 악조건을 극복하는 지혜, 가뭄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강인함. 이 세 가지 덕을 갖췄다는 의미다.

아이가 미나리를 먹으며 푸르름을 잃지 않고 싱싱하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이유식 큐브를 만들었다. 미나리의 향 때문에 먹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는데, 다행히 먹성 좋은 아이에겐 큰 문제가 되질 않았다.


아이의 이유식을 시작으로 자신감을 얻은 뒤 미나리 김밥, 미나리 유부초밥, 미나리 멸치주먹밥, 미나리 김치볶음밥, 차돌박이 미나리 파스타, 미나리 전, 미나리 양념장을 곁들인 야채솥밥, 미나리 오이무침, 미나리 간장불고기 등 손 닿는 대로 미나리를 부숴나갔다.


물론 미나리를 제때에 소진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한동안 전투적으로 미나리만 먹다가 '미나리태기'가 와서, 결국 다른 음식을 찾게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미나리는 냉장고 야채칸 귀퉁이에서 잊을만하면 슬그머니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 녀석은 이 긴 레이스의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눈치였다. 결국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든 미나리가 눈에 밟혀 나는 또다시 프라이팬을 들 수밖에 없었다.



닥치는대로 미나리 뿌시기.


#3.

사소한 부주의에서 비롯된 해프닝은 한동안 우리를 미나리 지옥에 빠트렸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풀숲처럼 고개를 내미는 미나리, 밥상마다 초록으로 물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지옥이라 여겼던 시간들이 마냥 암담하거나 우울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 불균형 속에서도 우리는 밀려오는 당혹감이나 짜증보다 순간순간 피어나는 행복을 먼저 알아채기 위해 노력했다.


남편이 만들어준 생(生) 미나리 김밥과 임신 당시 만든 삶은 미나리 김밥을 비교하며 '흑백요리사'를 찍기도 했고, 미나리와 대구살로 만든 이유식에 아이가 "꺅-!" 환호성을 터뜨리기도 했다.

무침 요리는 늘 한 끗이 모자라 깊은 맛이 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엄마의 비법을 살려 미나리 오이무침 만들기에 성공하였다. 게다가 육아를 하느라 아침밥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던 평소와 달리, 시간과 아이의 흥, 집중력 등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져 미나리 전을 성공적으로 만든 기적 같은 아침도 있었다.


시작은 부주의가 맞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어쩌면 시작이 그랬으니 결과마저 부주의 탓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기필코' 행복을 찾아 나섰다.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틀어진 삶의 균열 속에서도, 우리는 기필코, 기어코 행복 한 줌을 얻어내고야 말았다. 그리고 푸르름을 간직한 마지막 미나리를 팬에 올리며 또 한 번의 행복을 찾아본다.


봄비가 그치고 이제 막 벚꽃이 만개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미나리로 따끈한 전을 지져 첫 봄 산책을 나갈 준비를 한다. 여름에 태어난 아이가 맞이하는 첫 봄이다. 살짝 젖은 흙과 푸른 잎새 냄새가 창 밖에서 밀려든다.


아이에게도 기필코 행복한 순간이기를.





*미나리 근채삼덕(芹菜三德) 이야기: 미나리[권현숙의 전통음식이야기]. 영남일보. 2018.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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