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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rora Jun 27. 2018

당신은 릴케를 좋아하나요

#오로라 감성에세이 『06_이별에서 사랑을 품다』  

  

                                                                 Ⓒ photo by wonstar



  내가 손을 내밀면,

  세상이 손잡아 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젊었고 은빛처럼 날아오를 때였지요. 출근길 버스지하철을 갈아타면서도 갈 곳이 있는 게 당연하던 때였어요. 그때는 젊음의 호사가 세월 앞에서 무력하게 지나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고요. 더 오를 계단이 남았을 거라고만 믿었지, 인생의 중심으로부터 외곽으로 비껴 수 있다는 건 꿈에도 몰랐어요.


   젊음을 바쳐 일한 곳에서 권고사직으로 퇴사한 날, 고층 빌딩 사이로 떠오른 달이 애드벌룬처럼 보였다 말했던가요? 우리는 달이 빛난다고 믿지만, 사실 달은 빛을 낼 수 없는 행성이라더군요. 태양의 빛이 닿는 부분만을 반사하는 것이라서 마치 빛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라고요. 내가 평생 쫓아왔던 게 빛이 아니라 빛을 닮은 현상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왜 그리 어려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열정을 다해 살아온 삶이 어쩌면 삶을 향한
              일방적인 매달림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어요.



  아직 달릴 힘이 남아 있다고 한들 나보다 더 빠른 속도로 완벽한 경로를 향해 달릴 수 있는 젊음이 세상에는 넘쳐 나잖아요. 그걸 무슨 수로 이기겠습니까. 나 역시 젊음을 앞세워 누군가를 그렇게 앞질러 왔을 테니.




                                                                 Ⓒ photo by wonstar




  24시 편의점 앞 파라솔 의자에 앉아,

  상자 하나로 정리된 나의 이력을 되짚어보았습니다. 우주에서 보면 이 지구도 성냥갑만 하게 보일 텐데, 나는 이깟 상자 하나를 감당 못 할 무게로 끌어안고 낑낑거리며 살아왔더군요. 그 와중에도 내가 떠난 자리에 이미 앉아 있을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능력 차이를 저울질하고 있는 자신이 실망스럽더라고요.


  누구나 마지막 후회하기 마련이겠지요.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달렸던 날들이 생각났어요. 물수지를 맞추고, 타산이 나오지 않는 것은 낭비라며 자판기 커피 한 모금의 여유도 사치 여기며 살았네요. 행여나 구조조정 대상에 오를까 봐 없는 건수도 만들어뛰어다녔거든요. 각보험이며, 대출, 집세, 관리비…… 들어오기 무섭게 바닥을 치는 수치는 내가 여전히 바깥에 머물러 있다고 증명하는데 달리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요. 저 고층 빌딩의 작디작은 자리만이 인생의 유일한 기회라고 여기며 또 다른 삶의 자리 섣불리 포기하면서 살아왔는지모르겠네요.  



  다 잃었다고 생각하니 당신 얼굴이 올랐습니다.

  몇 번이나 전화를 하려다가 끝내 하지 못했습니다.



  잘 지내느냐고 문자를 보내려다가, 이제야 비겁하게 당신을 떠올린 나를 용서하지 못하겠더라고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가요. 잘 나갈 때는 높은 것만 바라보고, 바닥에 닿은 순간에는 곁에 있는 것에 매달리게 되네요. 언제나 내 입장에서 삶을 배려해주었던 당신의 마음을 나란 인간이 어떤 식으로 이용하고 살아왔는지 알 것 같습니다. 




                                                              Ⓒ photo by Filip Mroz



|당신은 사거리 편의점에서 일했지요.



  편의점에서 가장 오래 일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그곳을 떠나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이었지요. 회사가 끝나고 가끔 편의점에서 컵라면이나 도시락으로 늦은 저녁을 해결하다 보면 당신과 단둘이 남겨질 때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일거리가 없는 틈틈이 책을 꺼내 읽었고, 그 모습이 내게는 퍽 예뻐 보였어요. 당신 때문에 파블로 네루다를 알았고, 헤세를 알았고 릴케를 배웠습니다. 바닥을 쓸고 파라솔 의자들을 제자리에 정리하는 당신을 훔쳐보다가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던 날을 기억하나요?



  왜 여기서 일해요?



  당신은 물걸레를 든 채 나를 빤히 보았습니다. 여기가 어때서요. 당신의 삐뚜름해지던 입술, 똑 부러지던 말소리에 내가 지나치게 예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당신은 엎질러진 라면 국물을 정리하고 나서 내 뒤통수를 향해 지나가듯 말했어요.



  하루 종일 불 밝혀주는 곳이 있다는 게
마음에 들어서요.
 여긴 혼자 밥 먹기도 편한 곳이잖아요.



  당신은 글을 쓰고 있다고 했어요. 글 쓰는 게 그냥 좋다고. 이 일도 좋아서 하는 일이니 함부로 말하지 마시라고. 나는 한 번도 그저 좋은 일, 그냥 행복한 일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경쟁을 통한 실적 싸움에서 벗어나서 즐겁게 해보았던 일은 기껏해야 헬스 정도였어요. 하지만 헬스도 어느 순간부터는 몇 킬로그램을 빼야 한다는 목적으로 바뀌었고요.



  저기 사거리 맞은편 큰 회사 다니시죠?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거기 다니는 사람들은 밥 먹을 때 항상 시계를 봐요.



  당신에게 나란 사람은 대기업에 다니는 인재가 아니라 시계 앞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 정도였던 거예요. 그 당당함이 좋아서, 당신을 만나고, 당신과 연애를 하고, 언젠가는 결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미래를 그려보기도 했었지요. 약속 한번 제대로 지켜본 적 없는 나의 궁색한 변명 앞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줬던 사람이었으니, 나는  당신이 곁에 있으리라 여겼던 거겠죠.




                                                         Ⓒ photo by John Forson


  그때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다면, 당신은  나로 인해 계속 외로웠을 겁니다. 당신이 바랐던 건 승진이 아니라 나와 오래 천천히 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이면 됐는데, 나는 연봉이 얼마나 올랐는지, 내년엔 진급할 수 있는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요.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귀담듣지 않으면서요. 나는 새로운 걸 찾느라 소중한 것을 잊고 살았고, 소중한 것을 잊고 살았기에,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해?
  사랑하니까 만나지.
  아니, 진심으로 사랑하느냐고.
  나 오늘 바쁜 거 알잖아. 다음에 얘기하자.



  나는 그날을 기억합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었고, 나는 중요한 바이어와의 미팅으로 인해 회사에 꼼짝없이 묶여 있던 날이었습니다. 물속 깊이 잠겨 있던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서도 함께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 대신 내게 맡겨진 일이 무척이나 중대하다는 것만 설득시키려고 노력했었죠. 당신은 괜찮다고 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이제 다음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마지막 전화일지 모르니까 바쁘다는 핑계로 끊지는 말아줘. 당신이 회사를 마치고 편의점을 향해서 횡단보도를 건너올 때,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행복했었어. 내 삶에도 기다림이 생겼음을 감사했거든. 당신이 너무 급하게 밥을 먹어서 늘 안타까웠고, 당신 삶에 내가 쉼표가 돼줘야겠다고 생각도 했어. 당신도 처음엔 행복했을 거야.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 역시 당신 밥 먹는 속도를 따라가게 되더라.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밥만 먹게 되더라고. 밥을 먹는 시간만큼 정직한 시간도 없는데, 먹고사는 것만 걱정하느라 사는 걸 잊은 걸까. 지난번에 당신이 편의점에서 회사 동료들을 만났을 때 난처해하던 모습을 봤어. 나를 모른 척하던 시선도 봤고. 내 존재가 당신에게는 딱 그 정도였다는 걸 알면서도 당신의 존재가 나보다 소중해서 쉽게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 같아.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아버님 장례식은 늦게라도 내려갈게. 좀 이해해줘. 동료한테 맡기기엔 너무 중요한 일이라 그래. 내 진급에 영향이 갈 여지를 남기고 싶지 않아서. 당신도 알잖아. 나 여태 노력해왔던 거.


  알지. 당신이 삶을 위해 애쓰고 있다는 거. 근데 그 삶 속에 나는 없더라. 당신은 언제나 나에게 내일을 이야기하지만, 오늘이 없으면 내일은 없는 거잖아. 밥 잘 챙겨 먹고  창문 열고 자지 마. 목감기 잘 걸리잖아.



                                                    Ⓒ photo by Brandon Wong




  우리의 마지막 대화는 함께 했던 시간에 비해 터무니없이 짧았습니다. 마지막까지 당신은 내 안위를 걱정해주었지요. 당신이 떠나고 편의점으로 가는 사거리의 신호등이 더는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지만 다시 붙잡을 용기가 나지 않더군요. 그때의 나는 끝까지 나를 위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어둠을 밝히는 별들이 사라져 가기에 지상의 불빛들이 꺼지지 않는 걸까요. 나를 기다려준 당신의 마음이 없었다면 여기까지도 못 왔을 테지요. 그래요. 나는 다 잃은 게 아니라, 애초에 무언가를 가질 자격조차 없었던 겁니다. 나를 향한 당신의 마음이 세상의  전부일 수도 있음을 무시하며 살지 않았습니까. 미안해요. 당신이 듣지 않아도 진심으로 미안하고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어요. 당신은 나에게 인생이란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안아주는 거라고 했지요. 잠깐 인생에서 멈춘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거라고.


  |당신의 깊은 사랑을 늦은 저녁으로 받습니다.




                                                     Ⓒ photo by Yonghyun Lee




  신은 지금도 릴케를 좋아하나요?    

  위노나 젤렌카의 연주곡을 자주 듣나요?

  조용히 말하고 듣기를 좋아하나요?

  서점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책을 읽기도 하고요? 

  



  무엇이든 참 예뻤어요.
당신 자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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