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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rora May 09. 2018

이 별에서 이별까지

오로라 감성에세이#01_이별이 보여주는 사랑의 민낯

                                                                 Ⓒphoto by wonstar

            

  그건 빗방울이었을 거야.
  진심이었으나 거짓이 된 약속들.
  마주 웃던 과거로의 마주 우는 타임슬립.
  우산 없이 함께 걷던 하나였다가
  각자의 빗방울로 나뉘기까지
  우리는 서로를 위해 울지 못해서   
  우리가 낯설어졌어.
  눈물의 생장점으로 자라난 저 빗방울이
  하늘의 무게로 아파오는,
  아마도 그건 남은 진심의 온도.    



  너는 나에게 얼마나 진심이었니?     



  그 말을 뱉어낸 날 우리 관계가 끝이라는 걸 알았어. 이제 더는 시간을 돌릴 수 없음을 알면서도 함께 했던 시간을 믿으려고 애썼나 봐. 내일이면 다시 전화가 올 거라고 내가 믿었기에 너는 전화하지 않았겠지. 처음처럼 웃어달라고 네가 말했으므로 나는 웃지 못한 것처럼.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를 생각했던 그 긴긴 밤은 한때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되짚어 주더라. 나는 떠나온 뒤에야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걸 안 후에야 널 보내줄 수 있게 되었지. 네가 없는 그 빈집에 돌아와서 소파에 누워 이틀 동안 죽은 듯 자고 일어나 내가 한 일이 뭔지 아니?    


 

     소파를 버리려고 해요.      



  이웃집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어. 말 한마디 해본 적 없던 낯선 여자가 갑자기 나타나서 한 첫 말이었으니까. 소파요? 남자는 손목시계를 보며 지금이 새벽 2시라는 걸 알고 있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라. 남자의 뒤로 수많은 화분이 보였어. 소파를 버리겠다는 생각을 잠시 잊어버릴 만큼 많은 화분이었지. 남자는 그 작은 원룸을 화원으로 만들어버릴 결심이라도 한 걸까? 선반, 탁자, 책상, 창틀 할 것 없이 올려놓고 걸어놓을 수 있는 모든 틈에 화분이 있었어.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꽃과 화초에게 다 양보해버리고 살아온 건지 얼굴이 하얗게 떠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더라니까.  


  무섭게 왜 이러고 살아요?    

  

  왜 그랬는지는 몰라. 나도 모르게 진심을 말해버렸지. 당신은 왜 이러고 사는 건데요? 남자가 꽉 조인 허리띠를 풀어버린 얼굴로 말하더군. 그제야 나는 새벽 2시에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은 채 낯선 남자를 깨워 소파를 버리겠다고 말한 미친년임을 깨닫게 됐지. 나는 바보처럼 웃었던 것 같아. 아니, 울었던 거겠지. 나 자신에게조차 들키고 싶지 않았던 눈물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오는데 막을 재간이 없더라. 너와 나는 징그럽게도 싸웠지. 어떤 날엔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도 모르면서 말꼬리를 끈질기게 붙잡고 싸워댔어. 나를 이해해달라는 말이 너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이 되어 부메랑처럼 서로를 칠 때까지 죽자고 싸웠잖아. 방문을 닫고 들어가서 종일 말이 없어도 이상하지 않은 날들이 길어지고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는 것조차 불편해서 참을 수 없는 날들이 오고야 만 거야. 그러니 끝이라는 건 당연했지. 우리는 그저 그 끝에 닿은 것뿐이고…….    


 

                                                                 Ⓒphoto by wonstar



  ……소파를 ……두고 ……갔어요.

                                      

  벽에 쪼그려 앉아 어린애처럼 우는 내 옆에 남자가 같이 앉아주었지. 슬픔마저도 숨겨야 한다는 게 참 서럽더라. 나이 먹는다는 게 그런 거더군. 눈이 오는 날을 눈 빠지게 기다리던 어린아이가 어느 날 눈길을 걱정하는 조루한 어른이 되는 거. 불확실한 미래에는 발을 내딛지 않는 거. 너와의 미래는 도저히 그려지지 않으니 현실적으로 헤어지는 건 타당한 결론이지. 나는 이별을 합리화하기 위한 목록을 따로 만들어두었어. 근데 저놈의 소파가. 소파만 보면. 그딴 목록 같은 건 떠오르지 않는 거야.   

  

  그 새끼가 소파를 두고 갔다니까요.     


  저기 앉아서 텔레비전도 보고 밥도 먹고 애는 몇을 낳아 키울까. 결혼은 언제쯤 하면 좋을까. 가끔 누워 잠들기도 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행복했는데. 아니다, 꼭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네요. 자장면 먹고 흘렸다고 나한테 어찌나 지랄하던지. 어떤 날엔 좀 누워 자고 있는데 나보고 그러더라니까? 너 자꾸 그렇게 퍼질러 자니까 살만 찌는 거 아니냐. 여자면 관리를 하래요. 그러는 저는 뭘 관리를 했는데? 따지면 입 아파요. 관리 좋아하네. 내가 저한테 잘한다고 내 건 안 사도 그 새끼 로션은 꼭 챙겼거든요. 나요. 진짜 걔한테 다 맞춰줬어요. 옷도 취향도 바꿨다고요. 근데 그런 거 하나도 모르더라고. 그 새끼가 그래요. 로션은 또 챙겨갔어.     

   


                                                                 Ⓒphoto by wonstar



   그 여자는

   이 숨 막힌대.    


  뜬금없이 그 남자가 말을 하기 시작했지. 가까이서 보니 남자는 피부가 참 희더라. 투명에 가까워지는 중이랄까. 없는 사람인 듯 사라져가는 찰나에 내가 딱 걸쳐 앉은 기분이었어. 왜 이러고 사느냐고? 나를 용서할 수가 없어서 그래. 그 여자는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었거든. 봄이 되면 콧물 눈물 난리였어. 병신처럼 그 여자랑 헤어지던 날에야 그 사실을 알았지. 나한테 맞춰 주느라고 꽃을 좋아하는 척한 건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새로운 화분을 들여놓거나 꽃을 사오는 날이면 여자 앞에서 이건 이름이 뭔지 물을 며칠에 한 번 줘야 하는지 떠들어댔던 거야. 한번은 여자가 화분을 하나 깼어. 꽤 값이 나가던 난초였는데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내버렸지. 넌 항상 왜 그 모양이냐고 했던 거 같아. 울더라. 몇 년 동안 쌓이고 쌓인 걸 한꺼번에 다 털어내겠다는 듯.



  이 무서워.   

      넌 너만 보느라 내 아픔을 보지 못해. 



  자기가 뭘 그렇게 잘못했느냐고 소리를 지르는데 난 걔 목소리가 그렇게 크다는 거 처음 알았어. 꽃만 보면 숨이 막힌다나? 꽃가루 하나하나가 눈에 보인다면서 울더라고. 그 와중에 내가 뭐라고 했게? 나는 지금 화분 이야기를 하는 건데 넌 왜 딴소릴 하느냐고 했지. 깨뜨린 거 다 붙여놓으라고도 했어. 누가 너보고 참으라고 했냐? 아, 그 말은 하는 게 아니었는데……. 난 어리석게도 그 여자가 돌아올 거로 생각했던 가봐. 가끔 그랬으니까. 싸우고 나가도 해 지기 전에 돌아왔거든.    

 

  안 오더라.      


  그 여자가 결혼하고 애 엄마가 됐다는 소식을 들어도 믿어지지 않더라니까. 처음엔 미칠 것처럼 화가 났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잘못했던 일들이 꽃가루처럼 숨 막히게 하나씩 보이는 거야. 걔가 꽃 때문에 힘들어서 코를 훌쩍거리면 더럽다고 짜증이나 내던 골 때리는 인간이 나야. 내가 가르쳐준 꽃 이름을 기억 못 한다고 걔보고 무식하다고 말하던 진짜 무식한 새끼가 바로 나. 기념일에 꽃이나 사다 주던 …… 말도 말자……. 걜 잊으려고 틈만 나면 더, 더, 꽃과 화초를 사 나르다 보니 보시다시피 나란 인간은 식물이 되어가는 중이고 밤이 되면 식물들이 비웃는 소리가 들려.    



     저기요, 고작 꽃이잖아요.     

     그러는 넌? 고작 소파잖아.     



  내 소파는 달라요. 뭐가 꼭 달라야 하나? 못 버릴 거 같아요. 뭘 꼭 버려야 해? 못 잊는다고요. 왜 꼭 잊어야 하는 건데? 소파를 안 가져갔다니까! 그럼 소파를 가방에 넣어가겠냐? 이럴 땐 모른 척 하는 거예요. 야, 깨운 사람이 누군데. 근데 아까부터 왜 반말이에요? 그러는 넌 왜 존대를 하냐? 있잖아. 상대를 위해서 네 전부를 바꾸며 자신을 깡그리 낮추지는 마. 후회없는 사랑이란 건 지만 적어도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자신만은 남겨둬야 하는 거잖아. 네가 당연한 듯 참아줬기 때문에 상대는 몰랐던 거야. 네가 온 힘을 다해 지키려한 사랑의 의미도,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건지도 몰랐을 거라고. 그 남자는 오래전부터 만난 사이처럼 말을 들어주고 해주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어. 가려고요?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어정쩡한 자세로 나를 바라보더라.

 


  어쨌든 살아 봐
  산다는 거, 견뎌야할 책임도 있는 거잖냐.


  닫힌 문 안에서 흘러나온 그 남자 목소리가 첼로 같았다고 말했던가? 첼로는 온몸으로 끌어안고 연주하는 악기잖아. 가슴으로 울림을 느끼는 악기. 그 남자가 나를 안고 연주를 해준 느낌이랄까. 뭐, 나쁘진 않더라고. 생각해보니 그래. 너와 나의 관계는 자신의 연주만을 들어보라고 강요했던 건 아닌지. 울림을 잊어버린 현만 남은 첼로 같은 거. 다음 악장을 포기한 미완성 교향곡 같은 거. 이렇게 너를 용서하지 않으려고 했던 건 너를 기억하려는 나의 다음 악장이었음을 알고 있는지.   

 

  소파를 버리지 못했어.    


  이웃집 남자도 여전히 꽃과 화분을 사 나르더라. 우리는 종종 복도에서 마주치지만 모른 척해주고 있어. 누가 누굴 탓할 수 있겠니. 어떤 방식으로든 이별을 건너가려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한 방울의 진심이야. 저 차가운 빗방울에도 진심은 있을 테니 내가 우산 없이 젖은 길을 걷고 있어도 걱정하지는 마. 이제는 거실 한가운데 뗏목처럼 떠 있는 소파에 누워 너를 생각하는 일이 제법 편해졌어. 소파는 내가 놓친 너의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곤 해. 내가 잊어버린 너의 체온으로 나를 안아주며. 내가 듣지 못한 너의 목소리를 들려주기도 하지. 나는 아직 이별하지 못한 문밖의 계절에 서 있는 것  같아. 



Ⓒphoto by wonstar


이 별에서 한 사람을 만나 사랑할 수 있는 건
이별이 우리에게 주는 사랑의 또 다른 인사일 테니
오늘만은 너의 마음으로 나를 용서하고 싶어진다.
그러니 너도 오늘만은 나의 마음으로    

너를 용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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