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한 마음을 받아준 순간부터

#1. 초라함

by 플루토

초라한 마음이 있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고 숨기고 싶은 그런 마음.

어쩌다가 드러나는 순간, 초라함이 수치심으로 바뀐다. 나에게 마음은 초라한 것이었다. 즉,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초라한 게 이유인지 숨기는 게 먼저인지 알 길은 없지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자존심만은 굳셌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인 '비밀의 화원'에서 나오는 가사 구절이 있다. '그대 나의 초라한 마음을 받아준 순간부터' 이 구절이 나올 때면 왠지 마음이 아리다. 그리고 위로가 된다. 혹시나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언제나 따라다닌다. 그러다가 이 노래를 들으면 모진 마음마저 '그대'가 사랑으로 받아준다는 게 얼마나 아름답던지 찬란한 게 이런걸까.


아무것도 괜찮은 날이 아무것도 괜찮지 않게 되는 날이 있다. 가벼운 일이 한순간 비참함을 초래하기도 한다. 초라함은 그중 제일 마지막 감정이란 생각이 든다. 상황을 수습하고 벌어진 사건을 봉합하려고 하지만 끝끝내 남은 것은 초라해진 내가 있다. 초라하다는 것은 혼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다른 감정의 고유한 속성과 같다. 혼자서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지만 외롭거나 씁쓸한 기분은 타인에게 영향받는다.

그날의 하늘은 청아했다. 구름 몇 점이 섞여 있더라도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화창하다는 사실을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고. 홀로 보내기 아까운 날씨에 마침 가까이 있지만 보기 힘든 친구들을 봤다. 우리는 지난 이야기를 얘기했고 오늘에 대해 물었다. '안부'라는 이름의 뾰족한 삽은 마음의 토양을 한 움큼 파가는데 영양가 없는 흙은 그들의 마음에 닿기도 전에 바닥에 떨어진다. 창피한 순간이었다. 자연스럽게 만나서 서로의 토양을 교환하는 행위가 나는 무섭다. 보잘것없는 말이 그들의 마음에 닿기 전에 바닥으로 아님 그저 많고 비루한 소음으로 여겨질 까 두렵다. 시간은 무르익고 서로의 이야기가 겹겹이 포개질 때, 나의 마음 한 조각을 슬며시 꺼내보았다. 한 조각의 밀도는 깊지 않고 질량은 가볍다고 여겼다. 꼽꼽 씹어 삼키지도 못한 채 다시 입 밖으로 꺼내진 마음찌거끼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화되지 못한 마음을 바라본 내 마음은 초라하다. 어느 때보다 초라해진 날이다. 화창한 하늘에 화창하지 못한 '나'가 있었다.


다행히도 초라한 마음을 받아준 순간이 있었다.

쌀쌀한 바람은 손 끝부터 마음까지 얼릴 것 같았다. 장갑을 껴도 따뜻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겨울은 사람들의 체온과 온기까지 가져가고 가까워진 거리는 냉대가 있었다. 각박한 세상에 겨울이 불 때, 시린 마음은 쉽게 상처받는다. 눈만 오지 않은 늦은 오후에 나는 혼자 있었다. 차오르는 감정이 나를 사지로 내몰았다. 그러다 나의 비밀의 화원에 들어온 이가 있었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었지만 그는 나의 화원에 들어와 정성스레 보듬어주었다. 초라한 마음은 혼자가 아니었고 척박한 토양을 눈물로 적셨다. 나에게 이 순간은 너무 소중하다. 초라함을 초라함으로 보여준 그대가 너무 고마운 사람이 되었다. 나의 초라한 마음을 받아준 찰나를 잊지 못한다. 이 경험은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누군가 초라하게 앉아 있더라면 나는 그 마음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라도 그 마음을 혼자 둘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을 마음으로 다 갚을 수 없더라도 나보다 멀리 퍼질 수 있겠지. 마음이 마음으로 또 다른 마음으로 전해진다면 우리의 초라함은 더 이상 내 것만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