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멀리 지평선에서 아니면 수평선에서 불어온 바람이 나를 간지럽히면 기분이 좋다.
웃음이 새어 나온다.
바람은 나를 찾고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간의 잊었던 나의 고향을 떠올린다.
'여기에서 내가 태어났구나, 내가 돌아올 곳이구나.' 나의 안식처를 떠올린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위안을 삼는다.
같은 곳에서 출발했단 사실이 위로가 되고 모양과 생김새는 다를지 언정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사소한 동질감에 안도한다.
갈피갈피 쪼개진 바람을 따라 길을 걷다 보면 숲 내음이 풍긴다. 이유 있는 발걸음이든, 정처 없는 발걸음이든 나무 사이로 또는 그늘 사이로 걷는 길은 산뜻하다. 볼 일이 있어 길을 나서는데 도심에 있는 인도보다 숲 사잇길로 걷는 것이 더 좋다. 지나가는 사람이 별로 없고 바람과 바람이 부딪히는 이곳에서 나는 천천히 마음을 정리한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마음이 정리되고 불필요한 생각을 씻겨준다. 숲을 나오고 나면 마치 나를 빨래한 기분이다. 깨끗하게 말이다. 뽀얀 빨래가 잘 말릴 수 있게 볕을 조금 쐬고 나면 좋은 냄새가 난다. 잘 건조된 옷에서 나는 좋은 향이 나에게 난다. 그렇게 오염된 세상 속에 나를 지키는 방법, 산책이 나에게 그런 존재다. 산책을 위한 산책을 가기에 밤 시간이 참 좋다.
나의 귀찮지만 까탈스러운 면 때문에 낮에 산책을 잘 못 간다. 물론 햇빛이 남아있는 낮 산책은 참 좋지만 자외선 탓을 해보며 선크림을 바르기 싫어 밤 산책으로 미뤘다. 밤을 걷다 보면 주변이 조용하다. 멀리 보이던 시선은 자기 앞 길만 바라보며 좁아진다. 보랏빛 하늘에 걷는 이 시간은 참으로 자유롭다. 가로등 아래를 걷고 노래를 들으며 동네를 방황하는 이 시간 역시 나를 치유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밤 산책을 좋아하는 친구와 동행한 적이 있다. 우리의 동행은 주기적이고 꽤나 길었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 부르면 같이 얘기를 나누며 걷곤 했다. 물론 거의 그 친구가 부르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 친구의 걱정과 고민과 슬픔을 나누며 이 밤이 짧다고 여겨졌다. 되게 좋았던 점은 매번 다른 경로로 걸었다. 나는 매번 집 근처 산책로를 걸었지만 그 친구는 멀리 있는 곳까지 걷는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여러 군데를 다녔다. 지나다니던 동네도 밤의 모습은 새로웠고 어쩌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나쁘지 않은 거리와 풍경은 우리의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줬다. 같이 산책하던 시기가 어느 때보다 꾸준히 많이 걸었던 기간이다. 아쉽게도 그의 사정이 생겨 자연스럽게 동행은 해체되었다.
혼자 걷는 산책이든 함께 걷는 산책이든 즐겁다. 산책하러 나와 바람이 나의 피부를 스칠 때는 나는 생기와 설렘을 느낀다. 그간 지니고 있던 번뇌를 벗어나 잠시나마 자유로운 시간을 사랑한다. 의미를 두지 않던 풍경에 대해 다시 보며 지나치던 감정을 불러 모은다. 친숙한 길이든 새로운 길이든 어떤 길을 걷는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당신은 그것으로 충분히 치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