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다가온다. 나에게 호의를 베풀고 미소를 나눈다.
떠나는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궁금하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아직 웃고 있을까?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걸까.
안타깝게도 누군가 나에게 선의를 베푼 적이 거의 없다. 타의적인 이유든 자신의 이익을 위함이든 깨끗한 선의는 드물다. 제일 먼저 시작하는 사회생활인 유치원 때부터 지겨웠던 날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친절이었다. 그나마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친절은 분명 상대를 기분 좋게 한다. 상대의 기분은 나까지 동요하게 한다. 친절이라는 이름으로 쌓은 자존감은 모래성처럼 쉽게 허물어지기 쉽다. 언제까지나 친절이 모든 갈등과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다는 것을 학교에 들어가서 또렷이 알게 되었다. 물론 유년기에도 느끼고 있었지만 진정한 체감은 학생이 되면서 뚜렷해진다.
모든 종류의 친절을 앗아가는 존재가 있다. 매스컴은 아직 확립되지 않은 청소년들의 비행, 일탈로 말한다. 가진 자의 입으로는 가벼운 장난이라고 한다. 아직까지 학교폭력이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것을 보면 나태한 어른들의 태만이라고 본다. 굳이 괴물들이 아니더라도 학창시절은 충분히 사람들의 냉소를 알게되는 시기이다. 친절이 어쩌면 제일 무력한 무기가 되었을 때, 아이에게 무엇이 남아있을까. 무엇마저 포기해야만 할까.
아이들은 자라고 어른이 된다. 어른들은 친절해 보이는 사람이 된다. 친절을 가장한 이기심을 부린다. 왜 친절이라 부를까, 내가 보는 시야가 전부라고 생각하나 보다. 우리는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고 하지만 그건 지극히 가까운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잠깐 동안 이뤄질 뿐 금방 휘발된다. 내가 받은 친절의 종류는 대개 이러했다. 동기가 숨어있는 친절이었다. 나조차 맑지 않은데 누구보고 깨끗해야 한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자유로운 이는 아무도 없겠지. 그럼에도 이 사회가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다면 우리는 극토록 바라던 극단적 개인주의에 살고 있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친절을 타인에게 뿌리고 있었다. 이것이 이기적인 친절이었을까... 모르겠다. 나의 자존감을 지키고자 하는 방어기제였던 것 같다. 그래서 뿌린 친절을 다 돌려받지 못하더라도 받은 친절에 위안을 삼았다. 독립적이지 못한 의존적 자아에게 최선의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이 언제까지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다. 차라리 혼자가 되더라도 마음이 불편을 덜어내는 게 또 다른 이기심이란 생각이 든다. 되돌려 받기 위한 친절을 기다리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내가 준 마음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를 자책하게 된다. 타의에 결정되는 나의 기분은 결국 날씨와 같다. 제멋대로고 불규칙적이고 예상할 수 없다.
이것은 자유를 위한 투쟁이다. 나는 나의 기분을 정할 권리가 있다. 도착 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친절 대신 나에게 친절을 보낸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보살피는 일이야말로 나에게 보내는 내가 할 수 있는 잘할 수 있는 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