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서 / 김유섭
비웃음을 향해 날아가는 것은
주먹이 아니다.
짧은 한숨이라고 해야 할까.
사람이라면 가지고 있는
심장 박동이라고 믿는다.
공기를 갈라
하늘로 치켜든 턱을 일그러뜨리고
말아 쥔 손의 악력으로
배시시 내리뜬 황금 눈빛의 뼈를 부술 것이다.
악어가죽을 두른
서러움을 모르는 허리를
찍어 두들길 것이다.
신장이나 콩팥이 덜렁거리겠지.
관중도, 환호도,
챔피언 벨트도 없는 링
조명 따위 사라진 지 오래지만
어금니 악물고 주머니 속에 감춰 둔 것이 있다.
《김유섭 시인》
1960년 경남 남해 출생
2011년《서정시학》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찬란한 봄날』『지구의 살점이 보이는 거리』 등이 있다.
이사를 할 목적으로 모 처에 분양받은 분양권이 있다. 그 분양권 톡 방엔 젊은 주부 투자자들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투자 목적으로 사둔 여러 채의 분양권에 대한 시세와 조정지역에 든 아파트를 팔았을 시에 부가되는 세금에 대한 문의와 계산, 주식 및 비트코인 투자에 대한 정보들을 공유하고 서로의 의견을 나눈다.
나에겐 거의 신세계나 다름없는 정보들이 넘쳐난다. 어느 날인가 나는 톡 방에서 무슨 말인가를 하였던 것 같은데, 그들은 단체로 나를 좌익이라고 매도하였다. 나는 할 말을 잃어 당신들 같은 소액 투자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내가 말한 것은 큰손들이었다, 라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서는 서둘러 그 톡 방을 나와 버렸다. 이때에 내게 시인처럼 “어금니 악물고 주머니 속에 감춰 둔 것이� 있었다면, 나는 그들에게 멋진 주먹을 날릴 수 있었을까?
우리 모두는 고독한 복서다. “관중도, 환호도, / 챔피언 벨트도 없는 링�에서 매일 매일 무언가를 향해 주먹을 날리기도 하고, 무언가에 주먹을 맞아 쓰러지기도 한다. 어떤 강펀치엔 몇날 며칠인가 두문불출하며 끙끙 앓기도 한다.
“조명 따위�도 “사라진 지 오래지만� 우리들은 살아있는 한, 헛 주먹이라도 날려야만 하는 것이다. 적의 실체 또한 불분명한 오늘이지만, 적은 사방에 있고 어디에도 없을 수도 있다. 이 복서의 기질은 “사람이라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 심장 박동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시를 읽으며, 나는 마지막 연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조명 따위 사라진 지 오래지만 / 어금니 악물고 주머니 속에 감춰 둔 것이 있다.� 우리 모두는 “어금니 악물고 주머니 속에� 저마다 “감춰 둔� 비상의 주먹이 있다. 그 감춰둔 주먹으로 인하여 고단한 생을 이어갈 희망을 얻고 하루를 인내하며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다. 그것이 가족이든, 시든, 소설이든, 돈이든, 연애든, 그 무엇인가 감춰 둔 비상의 주먹이 있어 우리들은 오늘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 이 비상의 주먹은 무엇인가? 일단 오늘은 거실 창 너머 따듯한 햇살 한 줌과 며칠 전 새로 들인 동글동글 해맑은 워터코인 몇 뿌리라고 해두자. 조금 억측을 부리자면, 코인도 물에 제 몸을 깨끗이 행구면 저리 푸릇푸릇한 초록의 얼굴로 방긋방긋 웃고 있지 않은가.(홍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