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 장석주
최근 내 농업의 성장세는 실로 괄목할 만합니다. 오늘의 특용작물은 키스예요. 당신은 구름과 비의 일을 모르고, 서리와 얼음의 때를 모릅니다. 누가 청명과 곡우를, 파종과 수확의 때를 가르쳐주세요. 농장에는 향기로운 입술들이 백화제방으로 익어가요. 키스에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늘어나요. 키스를 잘 알았더라면 덜 불행했겠지요. 제분소에서 일한 적이 없어도 제분소집 딸과 만나 키스를 하는 게 사람의 일입니다. 인생은 오묘하고 그보다 더 자주 어긋나는 법이니까요. 제분소 일을 모르면서 제분소집 딸과 키스를 할 때 인생은 유쾌해져요. 우리는 키스를 모른 채 키스를 겪은 첫 번째 세대예요. 우리는 키스를 모르는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입니다.
우리는 양치류를 기르는 이의 키스가 천진하다는 걸 믿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키스는 아주 오래된 죄예요. 열 번의 죄, 백 번의 죄, 천 번의 죄. 첫 키스를 하고 흉중 어딘가가 불타는 듯해서 화들짝 놀랐습니다. 세상의 모든 키스들, 얼음 같은, 잿빛 구름 같은, 검은 커피 같은, 분홍 덩굴장미꽃 같은, 유월의 빗방울 같은, 기분 좋은 아침 식사 같은, 화산의 분출 같은, 죽음 같은……. 그리고 참전용사의 키스, 숙녀의 키스, 죽은 영웅의 키스, 누군가가 죽는 새벽의 키스, 해 그늘 아래 외딴집에서의 키스, 국화꽃 속의 키스……. 이 키스를 갈망하고 탐하는 나는 누구일까요? 아아, 나는 누구일까요?
첫 키스는 진흙과 햇빛의 맛. 키스가 우연과 무중력의 일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모호함과 회의는 얕아졌어요. 어떤 키스는 인생을 망치고, 어떤 키스는 참혹한 기쁨이지요. 사람들이 골목에서, 나무의자에서, 거실 소파에서, 풀밭에서, 강가에서, 벚꽃나무 아래서, 기차에서 키스를 해요. 당신은 아무 곳에서나 함부로 키스를 하는 오늘의 사태를 우려합니다. 이 나라가 키스의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의 땅이 되려면 키스허가제와 키스총량제가 필요하겠지만요. 의기소침하거나 우울증을 앓는 자들, 가난뱅이들, 주정꾼들에게는 키스를 허락합니다. 타버린 재들을 위한 불꽃, 낙화하는 꽃잎들에 비치는 마지막 빛, 상심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날카로운 기쁨, 그게 키스예요. 키스의 남용을 막아야겠지만 키스의 내밀한 역사가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아들과 딸들에게 키스의 덕과 악을, 키스의 교양과 보람을 가르쳐야 합니다.
《장석주 시인》
1954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 공모를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햇빛사냥』, 『그리운 나라』, 『새들은 황혼 속에 집을 짓는다』, 『어떤 길에 관한 기억』,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크고 헐렁한 바지』, 『헤어진 사람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등과 『한 완전주의자의 책읽기』 등의 평론집과 『낯선 별에서의 청춘』 등의 소설이 있음.
내게 첫 키스는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충격이었다. 작은 새처럼 떨리던 손과 심장 박동소리를 기억한다. 황홀했다기보다는 어디에선가 읽은 적이 있었던, 귓가에 은은하게 그러나 세차게 울려 퍼지던 종소리로 기억된다. 정말 종소리가 들렸다.
그 종소리를 나는 몇 해 전 교통사고를 겪었을 때 또 들었다. 마치 천사들이 나를 부르는 듯, 천사들의 합창과도 같았던 그 종소리, 그것은 목화솜이불 같기도 하여 그 포근하고 달콤한 잠에 하염없이 빠져들고 싶었던 그런 소리였다. 그러고 보면 키스는 삶과 죽음의 한가운데에 있는 매혹인지도 모른다.
시인의 시에서처럼 “인생은 오묘하고 그보다 더 자주 어긋나”서 “제분소에서 일한 적이 없어도 제분소집 딸과 만나 키스를 하는 게 사람의 일”이기도 하고, “어떤 키스는 인생을 망치고, 어떤 키스는 참혹한 기쁨”이 되기도 한다.
오늘 나의 키스는 어떠했는가? 나의 키스는 마땅한 키스였는가? 나의 키스는 삶과 죽음, 어느 편에 있었던가? 생각해 본다. 산책길에 마주친 나무와 풀과 꽃과 이름 모를 나비와의 키스에 나는 흡족하였다. 키스는 그 대상이 있다는 점에서 반대로 생각하여 본다. 나와 키스한 나무는 나의 키스에 거부반응은 없었을까? 오늘 나와 입 맞춘 나비는 나의 키스에 행복했을까? 혹시 부드럽고 살뜰하지 못했던 나의 키스에 그들은 짜증스럽지 않았을까? 내가 키스하여 영문도 모른 채 압사당한 무수한 개미들은 또 어떠한가? 부지런히 먹이를 구하고 먹이를 제 집으로 나르던 순결한 것들을 나는 키스라는 일방적인 명분으로 살해하지 않았던가.
시인처럼 모름지기 키스란 “타버린 재들을 위한 불꽃, 낙화하는 꽃잎들에 비치는 마지막 빛, 상심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날카로운 기쁨”이 되어야 하는 법인데, 내가 키스라는 명분으로 살해하고 만 미물들의 죽음 앞에 잠시나마 묵념하는 마음이 된다.
나는 사랑이 넘치는 키스로 내 주변 사람들을, 세상을 바라보았던가. 혹여 내 눈빛에, 내 말 한 마디에 상처받은 사람들은 없었던가. 절로 슬퍼져 나는 울게 된다. 나이가 들면 눈물 또한 흔한 것이 되어서 나는 울음과 더 자주 키스하는 나를 발견하곤 하는 것이다. 초록 잎사귀를 스스로 떨구어 바닥과 키스하는, 나무들의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헤아려본다. 바닥은 바닥대로 풍성한 초록 잎사귀를 올려다보고만 사느라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리하여 스스로 자세를 낮추어 바닥의 울음에 입맞춤할 줄 아는 나무의 자세는 얼마나 고결한 것인가.
나의 키스가 좀 더 낮고 낮아져서, 하염없이 가난해져서, 욕심 없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의기소침하거나 우울증을 앓는 자들, 가난뱅이들, 주정꾼들에게는” 보다 많은 “키스”가 “허락”되어, 부디 추운 겨울을 맞지 않게 되기를 소망한다.
이제 나는 새로운 키스를 준비해야만 한다. 최근 앓고 있는 강직성척추염이라는 애인과의 오랜 키스, 이 키스가 나를 살리는 키스가 되기를, 내 걸음이 죄 없는 이들을 죽음에 들게 하는 사약 같은 키스가 되지 않기를, 키스와 키스가 만나 보다 사랑 충만한 세상이 되기를 바래본다.(홍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