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었던 사람 / 이덕규
믿었던 사람 속에서 갑자기 사나운 개 한 마리가 튀어나와 나에게 달려들었다
개는 쓰러진 나를 향해 한참을 으르렁거리다가 어두운 골목 안쪽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믿었던 사람이 달려와
나를 일으켜 세우며 괜찮으냐고 물었다
조금 전 당신 속에서 튀쳐나왔던 그 개는 어디로 갔느냐고 되묻자 믿었던 사람은
가슴을 열고 더 무서운 개 한 마리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 개 말이오?
나는 결국 사람에게 지는 사람이다 나는 늘
사람에게 지면서도 그 흔한 위로의 반려견 한 마리 키우지 못하는 것은
오래전 내 안에 키우던 자성의
개비린내 나는 송곳니에게 호되게 물렸기 때문이다
견성한 개는 주인을 물어 죽이기도 한다
내가 키웠던 개들은 매번
주인을 물어뜯는 개로 자라서 나는 나에게도 지는 그런 슬픈 사람이다
《이덕규 시인》
1961년 경기도 화성 출생. 시집으로『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밥그릇 경전』『놈이었습니다』가 있다. 현대시학작품상, 시작문학상, 오장환문학상 등을 수상.
중학교 2학년 종업식날 친구로부터 쪽지를 한 장 받았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글귀, 큼직큼직한 필체로 써 내려간 쪽지엔《나는 너에게 졌다.》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그냥 묵묵히 견디고 있었을 뿐이었다. 당시에 나는 무슨 누명인가를 썼었는데, 소문의 주범이 그 친구였던 것이다. 그때 이후로 나는 결벽증에 걸린 사람 마냥 거짓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는 말씀하시곤 하셨다. 싸움에서 이긴 사람은 잠자리에서 뒤척이지만, 진 사람은 두 다리 쭉 뻗고 잔다고, 그래서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자식들에게 지고 사셨지만, 결국엔 자식들의 잠자리를 설치게 하셨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어쩜 잘 지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모든 사람들이 가엾게 생각되었다. 이 사람은 이래서 불쌍하고 저 사람은 저래서 불쌍하였다. 어머니는 이런 나에게 ‘네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오, 져주고 싶음이여!) 이런 생각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정말 그 사람을 위한 것이었을까? 어쩜 나는 이길 용기가 없어서 숨고만 싶었던 것은 아닐까? 적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비겁하게 지는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을까?...
시에서처럼 견성한 개는 누구도 물지를 못한다. 그런 자가 시인이다.
나는 생활의 어떤 장면에선 종종 어렸을 적 읽은『파리대왕』을 떠올리곤 하는데,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있고 어떠한 CCTV도 없는 상황인 무인도에서 기약 없이 생활해야만 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인간은 새로운 놀이를 개발하게 되지 않을까? “믿었던 사람 속에서 갑자기 사나운 개 한 마리가 튀어나와” 서로를 물어뜯고 할퀴고, 끔찍한 인간 사냥이 시작되지 않을까?(물론 이 시는 이런 특수한 상황에 처했을 때가 아니라, 일상에서 너무나 흔하게 목도할 수 있는,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 절대적으로 차단된 상황에 두 사람만 존재하게 된다면, 그 뒤의 일은 너무나 끔찍할 것만 같다. 인간 내면 깊숙이 감추어져 있던 동물적 본능이 뛰쳐나와 우리들은 한 마리 사나운 개가 되어 서로를 물어뜯을지 모를 일이다. 이 싸움은 한 사람이 완전히 목숨을 잃을 때까지 계속되는 게임이지 싶다. 상대가 비로소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졌을 때, 아연실색 지금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각성하게 되어 울게 될까? 아니면 포효하면서 승리의 기쁨에 취하게 될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은, 모든 문화예술은 자신의 내부에 웅크리고 있는 야생의 거칠고 포악한 짐승을 유순하게 다스리고 순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성 회복이야말로 예술이 추구하는 최고의 선(선(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살이의 어려움을 일찍이 깨치고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시인은 항상 지는 사람이다. 만물이 덧없고 가여워서, 그냥 져주는 사람이다. 종내 “나에게도 지는 그런 슬픈 사람이다.”(홍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