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만세

독립은 다 자란 자식들만 하는게 아니다

by 은해


어느 날 아이가 혼자서 걷게 되었을 때 부모는 아주 기쁘다.

처음에 뒤뚱거리며 걷다가 넘어지곤 할 때는 가끔 손을 잡아주기도 하지만, 가능하면 혼자 걷도록 잡은 손을 슬며시 놓아본다.

독립성을 길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혼자 걷는 일 말고도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가 늘 마음을 쓰는 문제가 아이의 독립성을 길러주는 문제인데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어려서는 어른이 밥을 떠먹여주다가 나중에는 혼자 먹도록 훈련하게 된다. 숟가락질이 좀 서툴러서 여기저기 밥알을 흘리더라도 혼자 먹어보라고 놔두기도 한다. 그런 시간을 견디다 보면 어느 날 부터는 혼자 잘 먹게 된다.

어디 그 뿐이랴. 엄마가 데리고 자다가 어느 정도 크면 자기 방에서 혼자 재우기, 처음에는 학교까지 데려다 주다가 익숙해지면 혼자 학교 다녀오기, 조금 더 크면 혼자 다른 도시에 사는 친구 집까지 여행하기 등 많은 일을 해보게 한다. 누군가에게 의존적이지 않고 독립적으로 자기 삶을 꾸려나가는 힘을 길러주기 위해서 부모들이 하는 노력들이다.

그렇게 자란 아이가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나면 부모도 아이를 독립시키고자 하지만 아이 스스로가 독립하겠다고 선언하고 집을 나가기도 한다.

이렇게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의 독립성을 길러주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매우 중요하지만 아주 어려운 일이다. 어느 시기에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아이에게 요구하는 것이 좋을지 부모는 아이를 키우는 매 순간마다 갈등하게 된다. 아이가 혼자 걷다가 넘어지기라고 할까봐 늘 마음 졸이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비단 신체발달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인 발달과 정서적인 발달 등 아이 인생의 모든 면에서 부모의 역할을 적절히 조절해야 한다는 말이다.

언제가 손을 잡아주어야 하는 순간이고, 언제가 손을 놓아야 하는 순간인지 잘 판단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말이 있다.

“낄끼빠빠”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라는 말인데 생각할수록 절묘하다.

아이를 키울 때 그리고 아이가 성장하고 나서도 또 결혼을 시키고 나서도 매우 유용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린아이 때도 그렇다. 부모가 모든 것을 다 해주면 아이를 망칠 수 있다. 결혼을 시키고 나서도 그런 것 같다. 부모는 낄 때만 끼고 빠질 때는 확실하게 빠져주는 것이 자식들 결혼생활의 독립성을 지켜줄 수 있고 또 자식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세월이 흘러서 자식들이 다 독립하고 나면 부모는 나이를 먹게 된다.

이제는 반대로 부모의 독립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자식들을 다 키워 떠나보낸 노인들은 경제적으로, 신체적으로 또는 정서적으로 충분히 독립적이지 못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족들 간의 애정이 더 강하고 끈끈할수록 노인들의 의존성이 더 강화될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에 ≪두 늙은 여자≫라는 책을 읽었다.

밸마 윌리스가 쓴 알래스카 인디언이 들려주는 생존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나이든 사람들을 두고 가지 않을 수 없소”라는 족장의 말과 함께, 두 늙은 여자를 남겨두고 무리는 떠난다.

알래스카의 겨울 한가운데 두 늙은 여자가 남는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뿐일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두 늙은 여자는 살기 위해서 “무언가 해보고 죽자”라고 마음을 바꾼다.

어린 손자가 떠나면서 무리의 눈을 피해 놓고 간 손도끼로 다람쥐를 겨눈다. 두 늙은 여자는 따끈한 다람쥐 고기 수프로 주린 배를 채운다.

그 날 밤 두 늙은 여자는 지난날을 돌아다보게 된다. ‘ 나 스스로 일을 한 게 아주 오래전이야. 언제나 나를 돌봐주는 누군가가 있었지.’ ‘늙은이들은 만족할 줄 모르고 불평을 해대지. 우리는 먹을 게 없다고. 젊었을 때가 좋았다고 떠들어댔어.’

그 날 두 여인은 너무 늦지 않게 스스로를 추슬러 어린 시절부터 배워온 지식과 기술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두 늙은 여자는 자작나무를 삶고 구부려서 눈신발을 만들고, 눈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잠을 자고, 토끼를 잡기 시작한다. 어느 날 그들은 자신들이 여러 해 동안 보행에 도움을 받기 위해 지팡이들을 줄곧 갖고 다녔다는 것, 그리고 무슨 일인지 이제는 지팡이 없이도 여러 마일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놀란다.

두 늙은 여자와 부족 무리는 그 후에 다시 만나게 되지만 두 여인은 더 이상 지나친 도움을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새로 발견한 독립성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가 아이들을 키울 때처럼 자식들 또는 돌보는 이도 노인들을 돌볼 때 ‘돌봄’과 ‘독립성’의 문제에 대하여 고민해야할 지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취약한 노인 세대를 젊은이가 잘 돌보아주어야 한다는 명제는 백번 옳다고 하겠으나, 노인들 스스로도 의존적이기 보다는 ‘독립성’을 새로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립’은 다 자란 자식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식을 다 키운 부모들도 ‘독립 만세’를 불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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