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자의 쓸데없는 이야기

여자의 삶을 다시 사랑하기로 한다

by 은해


내가 가보지 않은 그 길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제목처럼 나는 내가 가보지 않은 길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여자로 태어나서 여자로 길러지고 여자의 삶을 살아온 시간들을 되돌려 내가 내 삶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남자로 한 번 살아보고 싶다.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아직도 세계 곳곳에는 여자이기 때문에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제약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남자들도 남자이기 때문에 져야 하는 여러 가지 멍에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 무게가 여자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이 땅의 여자들이 짊어지고 온 억눌림과 제약은 자못 심각하다.


우선 남자로 살아간다면 밤늦은 시간에 친구들과 건들거리며 밤거리를 돌아다니고 싶다. 여자들에겐 뭐가 그렇게 위험한 것이 많은지 부모들이 일찍 일찍 다니라며 성화를 대기도 하지만 더러는 여자들 스스로가 밤거리의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일치감치 안전한 집으로 들어가 숨는 경우도 많다. 오죽하면 지금도 자기 아내를 ‘집사람’이라고 부르는 남편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란다.


예전에는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닌데 여자라고 늦은 시간까지 돌아다니거나 활동하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도 남자들과 비교하면 여자들이 늦은 밤까지 돌아다니는 일이 위험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많은 부모들이 유독 딸에게만 귀가 시간을 강제하고 있기도 하다. 어디 귀가시간뿐이겠는가? 여러 가지 상황에서 이 세상에 던져놓았을 때 남자보다 여자가 더 위험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대부분 어떤 위험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여자가 신체적으로 남자를 이기거나 제압하기가 어렵다는 이유에서 그렇게 느끼게 된다.

성별을 내가 선택해서 태어날 수 있다면 남자로 태어나 살고 싶은 첫 번째 이유는 일반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체력이 더 강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남자라고 하더라도 개인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통상 여자보다 남자가 더 강한 것은 사실이니까 나는 남자로 태어나 살고 싶다. 여자들의 평균적인 체력보다도 다소 떨어지는 체력을 가진 나로서는 튼튼한 체력을 가진 남자로 태어나 이 세상을 한 번 살아보고 싶다.

‘웬만한 일에는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이 세상과 한 판 겨루어 보고 싶다.’

나보다 약한 여자나 또는 남자를 만나면 흔쾌히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남자가 되고 싶다. 씨름판에서 상대를 번쩍 들어 땅으로 메다꽂을 수 있는 씨름 선수가 되든지 히말라야 정상을 거뜬히 정복하는 산악인이 되고도 싶다. 강인한 체력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지켜줄 수 있는 그런 멋진 남자가 되어 살고 싶다.

누군가에게 편안하게 기댈 수 있는 넓은 어깨를 내어주는 품이 넉넉한 남자로 살아보고 싶다.


남자로 태어나 살아보고 싶은 두 번째 이유는 주체적으로 내 사랑을 찾아 나서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정말 내 마음에 쏙 드는 고운 여자를 만나면 박력 있게 데이트 신청을 할 것이다. 꽃같이 예쁜 그녀와 차도 마시고 밥도 같이 먹고 공원을 같이 걷기도 하면서 내 진짜 사랑을 찾아 순례길에 나설 것이다.

찐 사랑을 찾을 때까지 그 순례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내 사랑을 내가 주체적으로 찾았다기보다는 내가 좋다고 대시하는 남자를 향해 ‘예스’ 또는 ‘노’라고만 외치는 지극히 소극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점이 못마땅해서다. 그렇게 좁은 풀에서 상대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못내 아쉬워서 인생을 다시 산다면 남자로 태어나 살면서 태평양 바다처럼 넓은 풀에서 마음껏 사랑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데 전화가 온다. 아들자식 키워봐야 다 소용없다며 이제 여자들 세상이 되어버렸다고 하소연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다. 결혼한 아들이 며느리 편만 드는 것이 서운해서 마음이 상해버린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 보니 ‘아차’하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살아온 여자로서의 삶이 못내 아쉬워 남자로 한 번 살아보고자 했더니 시기를 잘못 선택한 것 같다. 이제야 비로소 여성들의 인생이 살만해지고 있는데 이제와 새삼 남자로 사는 꿈을 꾸다니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닐까. 주식투자를 할 때 시장을 잘 읽지 못하고 꼭지에 사서 고생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가 아닌지 어쩌면 이미 꼭지를 지나 내리막길에 들어선 종목을 선택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다.


‘여자의 삶’을 다시 사랑하기로 한다.


좀 더 ‘여자’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해서 근면 성실하고 사냥 기술 좋고 건강하고 자상한 남자를 골라 여자 말 잘 듣는 남자로 키워내는 것이 더 좋은 길이 될 것 같다.

이상은 잠시 ‘남자’가 되어 살아보고 싶었던 어떤 ‘여자’의 쓸데없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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