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시선이 두려운 당신에게

깊이에의 강요를 읽고

by 은해


소묘를 뛰어나게 잘 그리는 젊은 여인이 전시회에서 어느 평론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당신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그녀는 그의 논평을 곧 잊어버렸지만, 며칠 후 그 평론가의 비평이 신문에 실리면서 확대 재생산되기 시작했다. 어느 저녁 초대 자리에서도 사람들은 그녀의 재능에 관해 말을 꺼내기도 했지만 뒤편에서는 ‘그녀에게는 깊이가 없어요. 사실이에요. 나쁘지는 않은데,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어요.’라는 말을 하는 걸 그녀는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깊은 바닷속에 사는 무지막지한 오징어처럼 나머지 모든 생각들에 꼭 달라붙어 그것들을 삼켜 버렸다. ‘왜 나는 깊이가 없을까?’

그녀는 그림을 다시 그리려 시도했지만, 때로는 줄 하나 긋지 못하는 적도 있었다. 그러자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소리 질렀다. ‘그래 맞아, 나는 깊이가 없어.’

그녀는 미술 서적을 세심히 들여다보고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화랑과 박물관들을 두루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미술 이론 관련 서적들도 읽었다.

그녀는 점점 이상해져 갔다. 화실을 비운 적은 없었지만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 미술품 상인이 베를린에서 전화를 걸어 그림 몇 장을 청했을 때, 그녀는 전화에 대고 소리쳤다. ‘나를 내버려 두란 말이에요! 나는 깊이가 없어요.’

그녀의 친구들이 걱정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식사나 파티에 그녀를 초대했지만 그녀는 매번 작업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한때 그렇게 그림을 잘 그렸던 젊은 여인은 순식간에 영락했다. 그녀는 외출도 하지 않고 방문도 받지 않았다. 운동 부족으로 몸은 비대해졌으며, 알코올과 약물 복용 때문에 유달리 빠르게 늙어 갔다. 집안 여기저기 곰팡이가 슬기 시작했고, 그녀에게서는 시큼한 냄새가 났다.

돈이 떨어지자, 그 여인은 자신이 그린 그림들을 전부 구멍 내고 갈기갈기 찢었다. 그리고는 텔레비전 방송탑으로 올라가 139미터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녀는 즉사했다.


앞에서 말한 그 평론가는 젊은 여인이 그렇게 끔찍하게 삶을 마감한 것에 대해 당혹감을 표현하는 단평을 문예란에 기고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거듭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 사람이 상황을 이겨낼 힘을 기르지 못한 것을 다 같이 지켜보아야 하다니. 이것은 남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또 한 번 충격적인 사건이다.

중략...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어떻게 보면 현실감이 다소 떨어져 보이는 이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에 와닿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평가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와 내 작품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보고 평가하는지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평론가의 평이란 많은 의견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평론가 또는 내 작품에 대해 평을 하는 사람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며, 어떤 경우 평론가는 작품을 위한 평이라기보다는 자기의 평론을 위한 평을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 평론가가 말하는 ‘깊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모든 예술 장르에는 작가가 있고, 그 작가의 작품을 평론하는 평론가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평론가의 평론은 절대적인 것일까? 그렇지 않다.

평론가의 평론조차도 또 다른 사람들의 평가의 대상이 된다.

더러는 작품 자체가 깊이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 작품을 평하는 사람의 안목이 그 작품의 깊이를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녀가 방송탑에서 뛰어내린 후 문제의 평론을 썼던 그 평론가는 ‘재능을 가진 젊은 사람이 상황을 이겨낼 힘을 기르지 못한 것’에 대해서 평론을 했다.


이 짧은 소설을 통해 작가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타인의 시선은 그저 그들의 시선일 뿐이라며 상황을 이겨낼 힘을 기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마음의 근육’을 길러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마음의 근육’은 어떻게 하면 기를 수 있을까?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이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뚜렷한 소신’ ‘흔들리지 않는 가치관’같은 것이 필요하다.

이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그 길이 사람으로서 가야할 옳은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배짱 같은 것이 바로 ‘마음의 근육’이 아닐까.

자기 내면의 중심을 잡고 자기 길을 갈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독일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일곱 페이지에 불과한 아주 짧은 소설 ≪깊이에의 강요≫가 우리에게 묵직한 사유의 꼭지를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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