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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해 Nov 13. 2022

바보의 벽

안다고 생각하는 것의 무서움에 대하여


 누구에게나 바보의 벽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가면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젊을 때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어떤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영국의 BBC 방송이 어느 부부의 임신에서 출산까지를 추적해서 만든 다큐멘터리를 기타자토 대학 약학부 학생들에게 보여 주었을 때의 일입니다. 이 프로그램을 보고 난 감상을 물었더니 남학생과 여학생의 반응이 뚜렷이 달랐던 것입니다. 여학생들은 대부분 “크게 도움이 됐습니다. 새로이 알게 된 내용이 많았어요.”라고 대답했고, 남학생들은 한결같이 “보건 수업에서 이미 배운 내용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스스로 정보를 차단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벽’이 존재합니다.

 이런 것이 일종의 ‘바보의 벽’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요로 다케시( 일본의 멀티 학자, 1937~)는 책의 서두에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의 무서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안다’라고 착각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안다는 것에 관해 좀 더 생각하다 보면 ‘현실이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하는 대상의 실체가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계란 그렇게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단지 텔레비전에서 봤다는 이유만으로 2001년 9월 11일에 뉴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통해 일정한 정보를 얻은 것만으로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감각이나 공포는 텔레비전을 통해 느끼는 그것과 상당히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자세히 아는 일이 그처럼 간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늘 확실한 뭔가를 갈구합니다.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 같은 일신교가 현실의 불확실성을 전제로 성립했다고 본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입니다.

 ‘본래 신이란 인간이 오랜 옛날부터 머릿속에 만들어 낸 존재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머릿속에 만들어 낸 존재들을 외부로 실재하는 존재로 만드는 작업을 계속해 왔습니다. 인간이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해 온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의식되지 않고, 신문이나 텔레비전도 그런 관점에서 논의하지 않지만, 현대 세계의 3분의 2가 일원론자라는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슬람교, 유대교, 그리스도교는 결국 일원론의 종교입니다. 일원론의 결점을 세계는 지난 백오십 년 동안 넌더리가 날 정도로 봐 왔습니다. 그러므로 21세기에는 반드시 일원론의 세계에서 벗어났으면 합니다.’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바보의 벽이란 일종의 일원론에서 기인하는 면이 있습니다.


 바보에게는 벽의 안쪽이 세상의 전부여서 그 너머는 보이지 않습니다.


 벽 너머의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일신교의 세계라는 것은 일종의 보편 원리입니다. 그곳에는 만능의 신 하나만이 존재합니다. 이슬람교든 유대교든 그리스도교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세계의 3분의 2를 차지합니다. 그 세계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보편성을 제시할 수 있을 까요? 물론 그런 대단한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 인간이라면 이럴 거야 하는 것 정도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보편성으로서 성립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인간이라면 이럴 거야 하는 것, 즉  ’상식‘이 궁극적인 보편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안이하게 신을 끌어들이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일원론적인 신을 끌어들이면 어느 방향으로 갈 때는 참으로 편합니다. 옳으니 그르니 따지지 않고 결정을 내릴 수 있으니까요.’

'안이하게 절대적 진실이 있다’라고 단정해 버리는 자세, 거기서 일원론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금방입니다.

 일단 일원론에 걸려들었다 하면 굳건한 벽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일견 편안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벽 너머의 세상, 자신과 입장이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당연히 대화도 통하지 않습니다.‘     

  일신교의 교인들은 절대 ‘저 사람들은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그냥 내버려 두자’에 그치지 않고 서로를 악마라고 부릅니다. 한 발짝 물러서서 보면 피장파장인데 말이죠.


 저자는 ‘안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암 선고와도 같은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치료법도 없는 암에 걸려 앞으로 반년밖에 못 산다는 선고를 받는다면 저기 피어 있는 벚꽃이 달라 보일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자신이 완전히 바뀌는 일입니다. 따라서 세상이 완전히 달라져 버립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는 것입니다. 설령 그것이 어제까지와 똑같은 벚꽃이고 똑같은 세상일지라도 말입니다.

 즉 이전까지의 자신은 죽고 거듭 태어나는 것입니다. 과거의 자신은 끊임없이 소멸하고 새로운 내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바보의 벽’은 어떤 것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끔씩 그 벽 너머의 세계를 기웃거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 벽 너머의 세계를 알기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80대 노 학자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최소한 ‘벽’ 그 너머의 세계에 관심을 두고 구도자의 자세로 살아가는 일이 더 즐거워질 것 같습니다.

 ‘인생의 참 의미’를 찾아가는 그 길에 내적 기쁨이 가득하기를 기대하면서 일면식도 없는 이웃나라 일본의 노학자를 책을 통해서나마 만날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오늘 또 한 번 더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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