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호박의 고백

by 은해


늙은 호박 두 개가 베란다에서 가을볕을 쬐고 있다.

늙은 호박 치고는 제법 그 자태가 단아한 것이 마음에 들기도 하거니와 워낙 호박을 좋아하는 터라 무슨 보물단지라도 되는 양 자애하는 마음으로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곤 한다. 산소에 벌초하러 고향에 내려갔다 오는 길에 얻어온 늙은 호박 두 덩이를 들여놓은 날은 베란다 바닥을 깨끗이 청소하고 볕이 잘 드는 자리에 놓아두었다. 한 열흘을 그렇게 들여다보기만 하다가 오늘은 저 늙은 호박으로 무엇을 해 먹을까 궁리해본다. 호박죽을 끓일까, 호박 국을 끓일까 생각하다가 오래오래 두고 먹을 욕심에 호박오가리를 만들기로 한다.

늙은 호박 한 덩이를 반으로 쪼갠다. 단단한 껍질 속에 숨어있던 노란 호박의 속살 안에 미끈한 실 같은 것과 엉겨있는 호박씨가 잔뜩 들어있다. 속을 긁어내고 반으로 자른 것을 다시 사분의 일로 나눈 다음 도마 위에 올려놓고 껍질을 벗기려고 하는데 늙은 호박의 껍질이 워낙 단단하여 쉽지가 않다. 조심조심 껍질을 벗긴 후에는 얇고 길게 다시 자른다. 아, 그런데 단단한 껍질 속에 들어있던 속살은 촉촉하고 여리다.

길쭉하게 자른 늙은 호박의 속살을 채반에 널어 다시 베란다에 갖다 둔다. 따끈따끈한 가을 햇살이 얇게 썰어놓은 호박의 속살 위에 포근히 내려앉는다.


‘노오란 늙은 호박의 속살은 참 곱기도 하지.’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포근포근하니 말라가는 늙은 호박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한다.

‘나도 저 늙은 호박처럼 겉은 나이 들어가더라도 속은 부드럽고 촉촉하고 쓸모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

‘저 고운 빛깔을 봐. 빨강이나 분홍처럼 예쁘거나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보면 볼수록 매력적인 은은한 담황색의 속살이 마음에 들어.’

‘나의 속 사람은 과연 어떤 색깔을 띠고 있을까. 저 늙은 호박의 속살만큼만 은은하고 고운 색이었으면 좋겠다. 넌 그 고운 빛깔을 간직하기까지 어떻게 살았니?’


그때 농숙한 늙은 호박이 나의 혼잣말을 들었는지 살갑게 대답을 한다.

‘힘든 시간이었지.’

‘꽃이 피고 나서 열매를 맺으면 애기 호박이 되는데 애호박전을 부쳐 먹으려고 사람들이 따가기도 하니까. 그 시기를 지나면 줄기에 매달린 채 자리를 잘 잡아야 하고, 시골에서는 배고픈 고라니나 노루에게 파 먹히는 일이 없도록 항상 조심했어야 했어.’

‘흰 가루병 같은 것에 걸리지 않도록 늘 처신을 잘해야만 했고 날씨가 좋다가도 갑자기 쏟아져 내리는 비와 바람에도 묵묵히 참고 견디기도 하며 살았어.’

‘하지만 그렇게 비가 내려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자랄 수 있었다는 것도 알지. 무엇보다 고마운 건 따뜻하게 내리쪼이던 햇볕이야. 마음이 춥고 서러운 생각이 들 때마다 날 위로해 주는 것 같았거든.’

‘지금 와서 생각하니 비와 바람, 햇볕 그리고 내가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돌보아주던 농부의 손길까지 그 모든 것이 참 고마운 일이었어.’

‘내가 꾸려왔다고 생각했던 나의 삶이 사실은 많은 것들의 도움으로 살아낼 수 있었던 거야.’

그러고 보니 늙은 호박의 속살이 호박오가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햇볕과 바람이 구 나하고 생각한다. 힘든 시간이었다는 늙은 호박의 고백이 내게 위로가 된다. 늙은 호박은 또 말을 이어간다.

‘그래서 이젠 나의 모든 것을 다 누군가를 위해서 내어주기로 했어.’


호박오가리가 잘 마르도록 베란다에 햇빛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채반을 옮겨 놓으면서 늙은 호박의 마지막 말을 곱씹어 본다. 나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일이라. 누군가를 위해서 나를 내어주는 일이라니......,

단단한 껍질 속에 감춰져 있던 여린 그 속살의 빛깔이 이리 고운 것은 바로 늙은 호박의 그런 넉넉한 마음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 마음 한쪽이 뜨뜻해져 오는 것만 같다.

사나흘이 지나면서 늙은 호박의 속살은 마르면서 오그라들어 제법 호박오가리의 모양새를 갖추어가고 있다. 이 늙은 호박과 내가 살아온 지나간 시간들을 되돌아보며 잘 익어간다는 것에 대해서 성찰해 보는 동안 호박오가리가 다 말랐다.

한 겨울까지 보관해두었다가 떡도 해 먹고, 나물도 해 먹고, 간장과 설탕에 짭조름하고 달달하게 조려서 김밥 속으로도 넣어 먹어야지 하는 욕심으로 잘 마른 호박오가리를 봉지, 봉지 담아서 갈무리해 둔다.


늙은 호박의 고백을 다 듣고도 또 욕심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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