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저편

-동네

by Sapiens


<am.5:50>



동네 '기억의 저편'



내 몸이 작았을 때 이야기다. 작은 육체에도 영혼은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초록 철제 대문을 지나 돌계단 세 개를 내려오면 넓은 올레밖이 펼쳐진다. 아직도 침잠하는 기억 속에는 아이들의 초저녁 뛰어노는 모습, 흙으로 무덤을 만들고 편을 갈라 노는 모습, 고개를 숙여 다리 사이로 집어넣어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굽은 등 위로 달려가는 아이들의 땀이 영근 얼굴들, 뚱뚱한 전봇대에 왼팔을 괴고 얼굴을 기대 서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읊어대던 순간, 멀리서 들리는 '밥 먹으라.'라고 외치는 나이 든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요란한 저녁 짓는 냄새가 진동한다. 그 향기는 현재의 시간을 잠식할 만큼 퍼져나간다.



내가 살던 어린 시절의 동네는 그런 곳이었다. 친구들과의 추억과 고향의 향기가 버부러진 아른한 입체 사진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빛바랜 사진처럼 흐릿해질 것 같지만 더욱 또렷하게 찾아오곤 한다. 길 잃은 기억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며 성장한다.



국민학교가 집 근처여서 매일 아침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학교에서 극장이라는 곳에서 단체 관람이라도 하는 날에는 어김없이 나의 집 앞을 지나갔다. 초록 철제 대문 사이로 세상의 모습이 확연히 다르게 펼쳐졌다. 대문을 나와 우측으로 꺾어 조금만 걸어가면 동네 하나밖에 없는 상점이 있다. 그곳에도 많은 기억이 담겨 있다. 하얀 수염이 까칠해 보이는 아저씨의 어그정한 걸음걸이는 지금도 선하다. 진열대 위 수많은 과자와 음료들을 바라보며 그 주인이 부럽고 상점 주인이 되는 희망도 품어보곤 했다.



집 앞에는 가슴 높이의 벽돌담이 쌓여 있었다. 그곳에 기대어 서면 또 다른 풍경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지금은 옛길이 되어버렸지만 당시 우리 동네는 번화가였다. 동문시장과 중앙로가 가까웠고 거의 걸어 다니던 시절이었다. 별들이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에서 아이들과 뛰어노는 모습 속에 작은 체구의 내가 교차한다.



큰 마을이 이제는 작고 초라한 마을로 변해간다. 많은 사람들이 신도시로 이주하면서 이제는 흉물처럼 변해가는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가끔 딸아이와 함께 어릴 적 동네를 찾았었다. 지금은 그 시절 살던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사람도 건물도 거리의 모습들도 확연하게 다른 옷을 입고 있다.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설렘과 불안, 그리고 안타까움의 감정들이 뒤섞이며 어린 시절의 기억 속으로 걸어가 본다.



나의 어린 시절을 담고 있는 동네, 그 지역의 기억은 절대 사라지지 않고 꿈틀거리며 숨 쉬고 있다. 육체는 병들고 사라지지만 추억은 더욱 또렷해진다. 그립다. 어린시절 내 동네에 한참을 머문다. 내가 살았던 동네는 나의 삶의 조각들을 담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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