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가 발달한 요즘 시각적인 요소들이 가미된 매체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바라보는 것들이 미술작품이 되고, 읽는 것들이 문학작품이 되어 새로운 무엇으로 재탄생한다.
요즘 개인적으로 동아리를 결성하고 그 안에서 책출간과 함께 전시 활동을 하고 있다. 기관이나 카페 등 장소는 다양하다. 굳이 갤러리를 찾지 않아도 전시되어 관객을 맞이하는 플랫폼들은 많다. 독자들을 만나 소통할 수 있는 창구는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안방에 앉아 세계를 바라보고 속속들이 거닐 수 있게 되었다. 거장들의 미술작품들도 감상할 수 있는 세상이다. 바야흐로 빠르게 변하는 흐름 속에 창작자와 관객의 거리는 좁혀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참 긍정적인 시그널이다.
굳이 전문적인 소양을 갖추지 않아도 자기만의 세상을 표현할 수 있다면, 누구나 예술가로 변신할 수 있다. 어차피 우리는 예술가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단지 발현되지 않았을 뿐이다.
육아에서 벗어나 자아에 집중하다 보니 세상의 초점을 나에게로 향할 수 있었다. 우리는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나의 또 다른 모습과 마주한다. 스케치북을 꺼내 무엇이든 그린다. 음악을 듣고 작곡가의 선율을 감상하고 작사가의 손길을 걸어본다. 자신만의 세계를 표현한 에세이를 읽으며 공감하며 작가와 만난다.
이 모든 행위 속에서 발현되는 감상들을 또 다른 무언가로 재창조되어 그림으로, 음악으로, 춤으로, 글로 표현한다. 이러한 행위는 우리가 예술가라는 방증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이가 가지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드러나지 않은 그 감각을 우리는 놓치며 현실 속 거리를 방황하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제 <사랑할 때는 최악이 된다>라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 속 남녀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 속에서 지우개로 지우고 지우며 그려내는 자신만의 몸부림은 제자리로, 또는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그림으로 그려내며, 주체적으로 찾아가고 있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방황한다. 방황의 의미는 꿈틀거리는 그 무엇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행위로 자기 다운 삶을 그려내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를 새롭게 바라보고 그려내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생활은 나만의 인생을 지어가는 하나의 문화가 되어 나를 색칠하고 있었다. 그렇게 끊임없이 덧칠하며 보이지 않았던 자신만의 세상을 펼쳐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