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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piens Jan 16. 2024

우리 사회에 배려와 포용이 필요한 이유

-문화 속 우리

<am 5:50>


얼마 전 기사를 읽었다. 유럽에서 온 아시아를 여행하는 젊은 부부였던 것 같다. 일본을 시작으로 출발한 아시아 여행 중 어린아이를 동행하고 기차를 탔다. 그러나 아이는 예기치 않은 상황마다 울어댔고 부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아이를 안고 조용한 곳으로 이동하기를 몇 번. 주변의 시선에 신경을 곧두서고 있었다고 한다.

아이의 울음소리만큼이나 불안했던 부부에게 갑자기 역사가 다가오더니

"죄송하지만 다음 역에서 하차해 주셔야겠습니다."

부부는 황당한 요구에 어쩔 수 없이 목적지가 아닌 모르는 장소에 내려야 했다는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부부는 한국도 똑같을 것이라 여기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경유지인 한국에서 일주일을 머물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달랐다고 했다. 오히려 우는 아이에게 다가와 사탕을 건네며 말을 걸어주더니 아이가 울음을 멈추고 힘든 젊은 부부에게 좀 쉬라며 우는 아이를 어느 노부부가 다가와 돌봐주었다는 훈훈한 기사였다. 읽으면서 참 따뜻해지는 기사였다.


하지만 오늘 아침 읽는 칼럼에서 다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게 된다. 반려동물은 환영한다면서 노인은 안 된다는 기사 제목이 눈길을 끌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노시니어존, 노키즈존을 떠나 누군가에게 불편한 부분이 있다면 어떻게 해결하려는 마음자세보다는 차단해 버리는 모습에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시대가 바뀌면서 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방식인 문화가 바뀌면서 기성세대는 소위 MZ세대들과의 접점을 찾기 힘들다. 서로의 세대는 거듭되며 연결되어 존재하고 있지만 너무나 빠른 속도의 변화로 간극은 더욱 멀어지고 말았다.


같은 세대 속 다른 문화를 접하며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들이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 자문을 해본다. 초고령화 사회의 진입으로 경제의 주체가 노인이 되고 있는 시점에서 노시니어존은 있을 수 없다. 그들의 존재 없이 경제 활동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을 타깃으로 하는 소비문화들이 생겨나는 추세이기도 하다. 단순한 해프닝처럼 느낄 수도 있지만 그 내면 깊숙이 존재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극히 개인의 바운더리를 침해당하고 싶지 않은 자기만의 성을 가지고 있는 젊은 세대와 속히 정이 그리운 시니어들의 문화가 충돌하고 있다고 생각해 본다. 우리는 한 세대를 살아가면서 어떻게든 서로 엮이고 풀어가며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 되었다. 그 시대에 생겨나는 문화들을 빠른 속도로 받아들이고 소비하는 것이 힘든 시대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가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시니어들이 있어 MZ세대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들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또 다른 세대들과의 충돌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사이클이기 때문이다.


결국 함께 할 수 있는 방법만이 해결책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배려가 넓은 아량을 지닌 포용력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갈림길이다. 세대는 그 시대를 이끄는 사람들의 문화를 생성하고 그 시대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우리의 문화는 물론 소멸되며 다시 생겨나기를 반복할 것이다. 그렇게 발전이라는 전철 위에 올라타고 있는 것이다. 변화하는 사회를 이해하고 공존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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