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아웃사이더의 삶이 좋았다. 아웃사이더의 삶을 자처하는 이유는 나의 성향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관계라는 그물망 속에서 얽히고설키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그 속에서 잘 융화되는가 하면,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또는 자의적으로 섞이기를 꺼려하는 경우가 있다. 나 역시 그러한 경계에서 수없이 타협하기도 했던 것 같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인간의 본성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럴 때 인간의 탐진치(욕심, 노여움, 어리석음)의 감정이 작용하면서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대충 타협하며 승자들의 입장에 서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했다. 그러다 보니 약자의 편에서 대변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사람들 사이에 섞이기가 쉽지 않았다.
어떤 공동체든 그 안에서는 편 가르기가 존재한다. 누군가는 희생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의 경우 불의를 못 참고 드러내는 성향임을 알기에 항상 바운더리에서 모난 관찰자의 시선으로 존재했다. 그러다가도 필요한 경우 대변자 역할을 자처하곤 했다.
어른이 될수록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리석고 약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그 속에서 우월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욕망은 더욱 강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부딪히고, 때론 타협하면서 우리가 탐, 진, 치, 즉, 탐욕과 어리석음, 분노의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진정한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되었다. 그러한 평온한 감정 속에 존재할 수 있다면 하루하루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가벼움 속에 자신을 둘 수 있다는 이치를 조금씩 공감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아웃사이더의 삶이 좋다. 오히려 당당하게 그러한 삶을 지향한다. 남들을 옥죄는 상황에서 벗어나면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 다양한 시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 놓일 때 펼쳐지는 상황은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이면을 볼 수 있는 생각의 회로를 전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