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삭제 모드

-버리는 용기

by Sapiens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하지만 때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자신을 괴롭힐 때가 있다. 땅에서 캐내는 고구마 뿌리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며 재생산되는 일속에 갇히곤 자신을 과거의 시간 속에 갇히게 한다.


살면서 삭제 모드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각의 줄기 속에서 얽히고설키면서 현재의 시간 속에 머물기 힘들 것이다. 더 심하게 되면 환청 속에서 살아가게 되기도 한다.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기억을 서랍 속에 넣어두기도 하지만 꺼내놓아 부여잡고 흐느끼거나, 노여움 속 자신을 가두어 놓기도 한다. 매일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는 행위일지라도 우리는 삭제 버튼을 누르지 못한다.


무조건 삭제하라는 말이 아니다. 휴지통에 버리는 행위는 쓸모가 사라졌을 때 행해져야 한다. 생각을 떠나보낼 때 자신을 치유하고 흔쾌히 보내줄 수 있어야 함을 염두하고 있어야 한다. 결국 보내주는 일도 잘해야 한다. 우리는 어리석음과 탐심, 그리고 노여움으로 부여잡고 삭제 모드를 누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때론 쉽지 않은 선택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떠나보내는 일을 제 때에 하지 못하면 망각의 시간이 빨리 찾아오기도 한다. 뇌가 과부하되어 이겨내기 힘들게 되면 자신이 망가지는 상태임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삭제 모드로 진입하게 되기 때문이다. 치매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서 고통 속 살아가는 이들이 많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끌어안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 때론 삭제 모드를 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신선하고 새로운 생각으로 뇌를 잠시 환기할 수 있다. 그것이 과거가 아닌 현재 속에 자신을 두는 일이기도 하다.


생각은 생각을 낳고 그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의 길로 인도한다. 그렇게 우리는 생각의 그물 속에 갇히게 된다. 그러니 멈춤으로 그 길을 빠져나오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의 공황도 그렇게 찾아왔을 것이다. 반갑지 않은 손님은 지금도 떠나지 않고 동침하고 있다. 그의 방문은 나의 뇌 속에서 자라나는 생각들을 잘라주는 계기가 되었다. 너무나 무성하게 자라 뇌를 가득 메우고 있을 때까지 나는 내 안에 갇혀 세상을 탓하고 있었다. 빠져나오고 싶어도 방법을 찾을 수 없는 상태에서 길을 잃은 채 방황하다 마주하게 되었다.


나에게 공황이 찾아올 때마다 힘들지만, 감사히 동행을 자처하고 있다. 적절한 시기에 삭제하지 못한 수많은 상처를 부여잡고 있던 나의 어리석음. 그 행위에 대한 대가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제는 거침없이 삭제 모드를 취한다. 공황과 동행하고 있지만,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공황이 가져다준 선물이기도 하다. 오늘도 나는 삭제 모드를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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