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살 어린 소녀의 그리운 큰 언니
만우절
태풍 ‘피토’가 다행히 중국으로 틀었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먹구름이 잔뜩 끼고 바람소리와 함께 빗방울이 한 두 방울 떨어지고 있다. 을씨년스러운 가을 날씨다. 오전과 달리 저녁이 되니 빗줄기가 제법 세어졌다.
그녀는 주방으로 가 따뜻한 원두커피를 내리며 빗소리를 계속 듣고 있었다. 커피 메이커에서 내리는 원두커피의 짙은 향이 그녀의 코 점막을 통해 스며들더니 그녀의 감성을 자극한다. 평소 즐겨 사용하는 하얀 딜리라고 쓰인 머그잔에 커피를 가득 채워 담고는 두 손으로 감 싸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가슴속까지 퍼지며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는 서재로 들어가 손안에 안긴 머그잔을 낡은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책상 위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스탠드를 켜자, 잠자던 방안의 고요하고 차가운 공기는 커피 향의 따뜻한 온기가 더해져 방 안 가득 퍼져나가 커피내음으로 채워진다. 여전히 빗소리는 그녀의 귀를 자극하고 있었다.
빗소리가 제법 가까이 걸어오는 것을 느낀다. 다가오는 빗소리의 발자국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그녀는 오른팔을 괴고 생각에 잠겨서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귓가에서는 속삭이는 빗소리의 발자국들이 이명 소리처럼 계속 들려왔다. 자신도 모른 채 이명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계속 들어가다 보니 커다란 달팽이집이 나타났다. 그녀가 달팽이집 속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만 회오리처럼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 안에는 그녀의 어린 시절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2남 6녀 중 막내인 어린 소녀는 작은 체구에 눈은 동그랗고,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이 참 귀엽게 생겼다. 도레미 단발인 헤어스타일을 한 소녀는 말 수는 적은 편이었지만 해야 할 말은 꼭 하는 편이다. 그래서 언니들은 어린 소녀가 한 번 말을 하면 쪼그만 게 어른스럽게 바른말만 한다며 핀잔을 주곤 했다. 소녀는 인정할 수 없지만 말이다. 하긴 나이는 어리지만 언니들보다 생각은 깊은 편이다. 일곱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은 어머니의 생활모습을 보며 자라서 그런지, 어릴 때부터 삶에 대한 철학적인 생각을 많이 하곤 했다.
큰 언니는 소아마비다. 어머니 말로는 어릴 때 열이 심하게 나더니 소아마비에 걸렸다고 하셨다. 그래도 어머니는 생활력이 참 강하셨다. 혼자 팔 남매를 키우면서도 힘들어하거나 우울증에 걸린 적은 없으니 말이다. 어머니는 기술 하나만 있으면 굶어 죽지는 않는다고 하셨다. 기술만 배우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고 믿으셨기에 몸이 불편한 큰 언니에게 한복 만드는 기술을 배우도록 했다.
큰 언니는 참 손재주가 좋아서 한복을 잘 만들었으며 **시장 안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다. 그렇게 큰 언니는 시장에 있는 유명한 포목집에서 한복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 큰 언니는 한쪽 다리가 짧아 걸을 때면 짧은 다리가 바닥에 닿을 때마다 “탁탁” 소리가 났다. 넘어질까 걱정스러운 어린 소녀의 마음과는 다르게 절뚝거리면서도 제법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매일 포목집까지 출퇴근을 했다.
무더운 여름날, 주말이면 큰 언니는 동생들을 모두 불러 모아 대청소를 했다.
“셋째는 안 방. 넷째는 마루, 다섯째는 유리창, 막내는 걸레 빨고 와라.”
이렇게 일을 분담해서 큰 언니가 지시를 하고 나면 우리는 시키는 대로 잘 따랐다. 그렇게 한바탕 대청소를 하고 나면 집안이 반짝반짝 윤이 났다. 소녀는 윤기가 나는 마루에 앉아 있기를 좋아했다.
큰 언니는 손재주가 좋아 뭐든지 잘 만들었다. 우리가 덮고 자는 사계절 이불포며 소녀가 여름에 즐겨 입는 민소매 파란 물빛 윗옷도 큰 언니가 직접 만들어 준 옷이다. 소녀는 그 옷이 참 마음에 들어 즐겨 입고 다니곤 했다.
우리 집은 대가족이어서 여름이면 마루에 상을 펴고 빙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그 날 따라 어머니는 커다란 상 위에 많은 음식들을 차려 놓았다. 기다란 상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앉았다. 이윽고 시간을 맞춘 것처럼 큰 언니가 퇴근을 하고 돌아왔다. 오늘도 절뚝절뚝 걸으며 시장에서 집까지 걸어왔을 것이 틀림없다. 어머니는 신발을 벗고 들어서는 큰 언니한테
“빨리 왕 밥 먹으라.”
재촉하며 퇴근하고 들어오는 큰 언니를 맞아 주었다. 이윽고 큰 언니는 하얀 봉투를 꺼내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큰 언니 월급날이었다. 그 날, 어린 소녀의 눈에 비친 하얀 봉투는 소녀의 마음 한 구석에 감사함과 미안함의 커다란 조각 사진으로 새겨졌다.
4월 1일 아침이 밝았다. 그날 우리 반 교실에서는 수업은커녕 선생님들을 속이려고 분주하게 움직였고, 친구들끼리 속아 넘어가 주면서 한 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오늘만큼은 공개적으로 남을 속여도 용서해주는 날, 바로 만우절이다. 만우절! 자꾸 만우절이란 단어는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걸어오는 내내 소녀는 생각에 잠겼다.
‘정말 오늘은 속여도 모두 용서해 줄까?’
집으로 걸어오면서 줄곧 고민을 했다. 소녀는 집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그래, 큰 언니도 이해해 줄 거야!’
어린 소녀는 결심을 하고 말았다. 그리곤 안방으로 들어가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수화기를 들었다. 검지 손가락으로 동그란 구멍 속 번호 하나하나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따르릉~따르릉~”
신호음이 내 심장소리만큼이나 어찌나 크게 들리던지... 이윽고
“여보세요?”
포목집주인 아주머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언니 막내 동생인데..., 집에 일이 생겨서... 저... 우리 언니... 집으로 보.. 내주세요.”
어린 소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소녀의 말을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 옆에 있는 듯 아주머니가 큰 언니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 야이 뭐란 햄 시니? 아고 집에 오랜햄쩌. 집에 뭔 일 생겼덴.. 빨리 가보라.”
수화기가 ‘덜커덩’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소녀의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치기 시작했다. 소녀는 해서는 안 되는 나쁜 짓을 한 것처럼 겁이 났고 더욱 세차게 나대는 심장소리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평상시 같으면 20분은 족히 걸리는 거리인데 큰 언니가 ‘헐레벌떡’ 초록색 대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윽고 헉헉거리는 숨찬 목소리로
“무사? 무슨 일이고?”
하면서 들어오는 큰 언니 얼굴은 하얗게 질러 있었다. 아뿔싸, 소녀는 더욱 겁이 났다.
“저...... 큰 언니... 오늘이 만우절이라서...”
하얗게 질린 큰 언니의 얼굴을 보니 소녀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소녀의 예상과는 다르게 일이 이상하게 꼬여 버렸다.
“뭐? 야이 보라게. 집에 큰 일 생긴 줄 알았잖아.”
기진맥진하며 대청 마루턱에 주저앉는 큰 언니의 모습을 보며 소녀는 오히려 죄인이 되어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큰 언니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치면서 집 안으로 들어와서는 부엌으로 향했다. 양손으로 파란 플라스틱 주걱을 들더니 물 한바 가기를 물항아리에서 떠서 ‘연거푸 연거푸’ 들이켜 마시고는 오른손으로 입을 닦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야, 다음부터는 이런 장난 하지 마라.”
큰 언니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다시 포목집을 향해 대문을 나섰다.
소녀는 마음속으로 이야기했다.
‘큰 언니... 오늘 만우절이어서... 언니를 집으로 부르면 오늘 하루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해서... 죄송해요...’
소녀는 허탈한 마음으로 대문 밖으로 서둘러 나간 큰 언니를 따라 대문 밖으로 나왔다. 올레 밖 돌담에 기대어 큰 언니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큰 언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뒤뚱뒤뚱 서둘러 걸어가고 있었다. 큰 언니의 뒷모습이 천천히 소녀의 두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소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맺힌 눈물 송이 때문에 더 이상 앞을 볼 수 없었다.
눈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 어린 소녀는 달팽이집을 빠져나왔다.
깊은 밤 소리 없이 내리는 비는 여전히 내 마음을 세차게 내리치고 있었다.
-2013. 10. 7. 을씨년스러운 가을, 깊은 밤에... 11살의 어린 소녀를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