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주는 소리
운무
오늘도 어김없이 천왕사를 찾았다. 첫째가 취업시험을 앞두고 있고, 둘째가 군입대를 했기 때문에 남편과 나는 주말이면 천왕사를 찾는 게 암묵적 약속이 되어버렸다.
아침에 집에서 출발할 때는 날씨가 화창했는데 도깨비도로로 진입하면서 날씨가 점점 변화되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스산한 바람과 찬 기운이 느껴졌다. 미리 준비해둔 긴소매 카디건을 꺼내 입었다.
사실 이제는 우리 둘만 남아있어서 데이트 겸 드라이브코스로 천왕사를 종종 찾기도 했었다. 그러다 마음이 내키면 서귀포까지 드라이브를 한다. 오롯이 차 안에 있는 둘 만의 시간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과 이야기를 하게 해 준다.
20대의 우리가 아님을 느끼는 순간이 되기도 한다. 50대의 나이에 조금은 경제적 여유와 마음의 여유를 찾은 시기라 세상을 넉넉하게 바라보는 시야도 갖게 되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느끼고 경험했던 우리만의 추억들을 소환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테이크아웃 커피 한 잔이면 충분하다. 우리에게 차 안은 멋진 카페가 부럽지 않은 장소가 되어준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사람과 단 둘이 이야기하면서 헝클어진 자세로 시간을 즐길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우리 부부에게 중요한 이벤트 역할을 해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천왕사 입구까지 와 있다. 점점 운무가 몰려오더니 한 치 앞도 내다볼 수가 없다. 조심스럽게 올라가는 동안 잠시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참 우리의 인생과 닮았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순간 뒤의 일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지만 누구나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차를 조심스럽게 주차를 하고 초를 사러 발길을 옮겼다. 항상 초 두 개를 사서 스티커에 기도문을 정성스럽게 쓴다. 남편은 양 손에 초 하나씩을 들고 대웅전을 향해 걸어간다. 나는 남편의 옆을 지키며 나란히 걸어간다. 습관이 되어버린 것처럼 우린 그렇게 하나가 되어 있었다. 대웅전에 들러 절을 하고 기도를 하고는 다시 계단을 올라 나한님들이 모셔있는 산사를 지나 산신님들이 모셔져 있는 산신각으로 오른다. 매번 오르는 계단이지만 계단을 오를 때마다 우린 헉헉거린다. 그 와중에서도 난 이 계단 하나하나를 오를 때마다 마음이 정숙해지며 계단을 오르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 고개를 숙이고 돌계단 하나하나를 밟고 오르며 이 또한 우리의 인생과 많이 닮아있음을 느낀다. 누구나 이 계단을 오르며 마음가짐을 정숙하게 가질 것이다. 무언가를 기원하는 인간들의 속세의 마음이 계단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것 같다.
산신각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천왕사의 절경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운무로 가려졌다가 다시 사라지며 젖은 나무와 초록빛의 나뭇잎들의 생기가 품어져 나온다. 이슬의 촉촉함이 피부에 닿아 기분이 묘해지면서 고요함을 느낀다.
운무로 앞이 선명하지는 않지만 답답하지 않다. 오히려 운무가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가려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세상의 나쁜 모습들을 이렇게 가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에는 선과 악이 존재하고 모든 일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산신각에서 만난 운무는 나에게 그 사실을 말해주는 듯하다. 선과 악을 볼 수 있어야 함을... 결코 악을 가릴 수는 없다는 것을... 운무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옅어지면서 나무들의 형태가 보이기 시작한다. 꺾어진 나뭇가지도 선명해게 보이기 시작한다.
남편과 나는 산신각에 모셔진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고는 초에 불을 붙이고 초를 꽂았다. 이것은 첫째를 위한 초이다. 많은 사람들의 염원의 불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태우며 염불을 하는 듯하다. 우리는 합장하며 기도를 하고는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오를 때와는 한껏 여유로움을 가지고 내려오다 보면 부처님의 제자들을 모신 나한당이 있다. 개인적으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다. 이유는 사람들이 없어서 오롯이 기도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돌계 단위에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 향을 피운다. 불전을 올리고 나란히 절을 하고는 잠시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곳에서는 좀 여유를 갖고 기도의 시간을 보내는 것 같다. 한 참 있다가 우린 약속한 듯 일어나서 뒤돌아 걸어 나왔다.
다시 계단을 내려오다 보면 처음 들린 대웅전을 만난다. 그러면 다시 대웅전을 향해 합장을 하고는 고개를 숙여 목례를 하며 뒤돌아 내려온다. 마지막 계단까지 다 내려오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움을 느낀다. 누구의 강요나 방해 없이 부처님과 만나는 시간이 참 좋다.
아직 남편의 손에는 초 하나가 들려 있다. 천왕사 언덕을 오르고 초입에 마련되어 있는 용왕을 모신 곳이 있다. 그곳에도 사람들이 붐비지 않아 좋아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마지막 초에 불을 밝히고 우린 합장을 해 기도를 한다. 세 번 절을 하고는 문을 닫고 나온다. 운무는 아직까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시야가 50미터는 확보되는 거리다. 운전하는 데는 문제 되지 않는다.
오늘은 절에서 운무를 만나 더 마음이 고요했고 경건한 마음으로 자연현상이 건네는 삶이 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