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그녀는 흐릿한 기억 속 스치는 한 경험의 포장을 뜯고 있다. 서서히 풀리는 상자 안에는 그녀의 고등시절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자율학습을 하는 날이다. 6교시의 수업이 끝나고 소녀는 저녁시간을 보낸 후 교실로 들어서고 있다. 친구들이 하나 둘 교실로 들어오더니 빈자리들이 꽉 차기 시작했다. 순간, 소녀는 답답했다. 매일 반복되는 여고생의 시절 속 무언가 남기고 싶다는 충동이 일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고등학생이라는 시절을 떠 올렸을 때 미소 지으며 떠올리는 이벤트 하나쯤을 만들고 싶었다. 소녀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 시절 학생들에게는 펜팔이 유행하고 있었다.
섬에 살고 있던 소녀는 육지를 갈망했고 나름의 서울이라는 곳으로 상경하는 꿈을 가슴에 품었다. 문화적 혜택이 적은 섬이라는 조건에서 벗어나 다양한 경험을 갈망하기도 했다. 소녀뿐만이 아니라 모든 또래들이 그랬다.
교실 안은 시끌벅적했다.
“얘들아, 우리 펜팔을 해서 먼저 답장이 오는 친구에게 한 턱쏘는 것 어때?”
우리는 당시 유행하던 잡지를 보며 펜팔 주소 하나씩을 선택하고 있었다. 소녀도 주소 하나를 선택해서 자율학습 시간에 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알리는 긴 장문을 써 내려갔다.
참 무모하지만 순진했던 소녀의 고등학교 시절 이벤트였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간 소녀는 책상 위에 놓인 하얀 편지봉투에 씐 모르는 이름을 보았다.
“아싸~”
친구들과 내기를 한 편지가 도착한 것이다. 소녀는 순식간에 편지를 뜯어 읽어 내려갔다.
다음날 소녀는 학교에서 편지를 자랑하고 있었다. 미션을 수행한 친구들 중에서 소녀가 처음으로 답장을 받은 것이었다. 교실 안은 난리가 났다. 친구들과 편지를 돌려 읽으며 한순간에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정말 편지가 오다니! 믿기지 않았다.
편지 속 답장을 준 그는 서울에 살고 있는 고3 오빠였다. 친절하게 나름 자세하게 자신의 소개가 있었고 제주에 대한 상상을 하며 글을 써내려 갔다. 글을 읽으며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마치 연애편지처럼 느껴지는 감정은 소녀만의 반응은 아니었다. 그날 소녀는 친구들의 둘러싸임 속에서 우쭐한 모습으로 상기되어 있었으니까.
어느 날 문득 한 통의 편지가 더 왔고 제주에 온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 시절 우리는 빵집에서 만났었다. 참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추억의 파편들이 그녀의 미소 속에 비치고 있었다.
정말 추억 하나를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소녀는 얌전하면서도 문득문득 도전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경험을 사고 자기만의 색이 입혀지고 있었다.
누구나 추억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다. 시간의 마디마다 희로애락이 담겨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순간을 메꾼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 보면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이후로 쫓기는 시간 속에서 주어지는 일들에 치여 살았던 것 같다.
그녀는 어릴 적 추억 하나를 떠올리며 잠시 쉬어간다. 소녀가 바랬던 것처럼 고등학교 시절 소중하고 순수한 경험의 조각이 되었다. 그 시간은 잊히지 않은 채 박제되어 그녀의 기억 속 사진첩에 고이 담겨있다. 어느 날 문득, 또다시 찾아와 함께할 소중한 파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