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유산

글제: 가족

by 전해숙

어느새 40년도 더 지났다. 엄마는 겨우 쉰여덟에 위암으로 우리 곁을 떠나셨다. 스물다섯 살 외동딸과 막내아들 결혼도 보지 못한 채였다. 세상 어디에도 발 디딜 곳이 없어 허공에 떠다니는 것 같은, 딱 그런 마음으로 한동안 방황했다. 세월 지나면 잊힐 줄 알았다. 아니었다. 엄마가 되니 더 그리웠고 나이를 먹을수록 엄마 목소리는 더 생생히 살아났다. 어디에서나 지켜보시는 것 같아 말도 행동도 늘 조심스럽다. 신은 모든 이에게 갈 수가 없어 대신 엄마를 만들었다는 말을 증명하는 것만 같다.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이름 석 자마저 읽지 못했다. 꽤 많은 토지에다 지역 유지 소리까지 듣던 외할아버지였지만, ‘교육은 아들에게만’이 소신이었다. 결국 네 딸은 모두 까막눈으로 남았다. 엄마는 겨우 보리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집으로 시집을 왔다. 한이 맺혔던 것 같다. 엄마는 외할아버지와 달랐다. 우리 오 남매에게 누구든 열심히 공부하면 땡빚을 내서라도 끝까지 밀어주겠노라 수시로 선언하셨다. 덕분에 난 시골 중학교에서 대도시의 고등학교로, 이어서 대학까지 졸업할 수 있었다. ‘아들도 아닌 딸에게 무슨 대학을?’이라는 수군댐을 들은 척도 하지 않던 부모님! 그 결과가 지금의 나다.


기억 속 부모님은 참으로 금슬이 좋으셨다. 내 머릿속엔 한 번의 말다툼도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한 폭의 수채화로 각인되어 있다. 엄마는 저녁을 일찍 지어놓고 동구 밖까지 아버지 마중을 나갔다가 나란히 돌아오시곤 했다. 초등생 꼬맹이 눈에도 그것은 참 아름다웠고 이유도 모른 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고등학교 때 어느 주말, 고향 집 안방에서 엄마와 나란히 누워 얘기를 나누다 그 비결을 알았다,


“엄마, 아버지와 어떻게 그렇게 안 싸우고 살 수 있어요?”

“아이고~야야! (한숨) 부부가 우째 싸우지 않고 살 수 있겄노? 니가 나중에 시집가면 말해줄라 했더마는 물었으니 미리 얘기 하꾸마. 이 말은 명심하거래이. 부부 싸움은 꼭 이불 밑에서만 해야 된대이. 니가 아무리 옳고 똑똑하더래도 일단 다툼이 시작되마 니가 그 순간은 참아야 되는기라. 그라고 밤에 이불 밑에서 조목조목 얘기하마 그 어떤 남자도 지게 돼 있고 결국 니가 이기는기라.”


열쇠는 아내의 현명함이었다. 꼭 그러리라 다짐했지만, 한 번도 실천하지 못했다. 바로 불만을 터뜨려 갈등은 더 커졌다. 견해차에서 오는 부딪힘이니 그런다고 즉시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속앓이는 언제나 내 몫이었다. 대학 교육까지 받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학교 문 앞에도 못 간 엄마는 어떻게 평생을 실천하며 사셨을까. 흉내조차 못 내는 엄마의 위대한 모습이다.


엄마의 말씀은 이어졌다.

“그라고~ 나는 시집오민서 한 가지를 결심하고 왔대이. 시어머님과 손위 동서한테는 어떤 일이 있어도 말대꾸는 안 할끼라꼬. 니도 시집가면 절대 그라마 안 된대이~”

외숙모가 외할머니에게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것이 시누이인 엄마는 그렇게 보기 싫었다고 한다. 그 말씀은 결혼하면서 바로 나의 현실이 되었다. 형님은 시부모님과 20여 년 함께 살고 있었다. 그것도 신혼부터였다니 이런저런 고부 갈등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 나는 시어머님이 아들보다 먼저 점찍은 막내며느리였다. 형님으로선 한 편인 것 같은 시어머님과 동서가 곱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의 처신에 따라 새로운 문제가 보태질 수도, 있던 갈등이 약해질 수도 있는 분위기였다. 엄마의 그 말씀은 철저히 지켜야 할 첫째 수칙이 되었고 지금까지 잘 실천하고 있다. 그 덕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시어머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어떤 고부 갈등도 없었고, 형님과도 모두 부러워하는 사이로 잘 지내고 있다.


엄마가 남긴 교훈은 또 있다.

“야들아~ 내가 비록 가난하지만, 돈 많은 사람, 그거 하나도 안 부럽대이. 밖에 나가서 자식 얘기 나오마 고만 힘이 막 나는기라. 그래도 막 자랑하고 다니고 그라마 안 되는 기다. 자랑거리는 남이 먼저 아는 법인기라. 알겠제?”

그랬다. 마을 사람들은 공부 잘하는 아들딸을 둔 엄마를 모두 부러워했지만 뽐내거나 우쭐대는 법이 없었다. 대신 우리 앞에서는 무한히 자랑스러워하며 자신감을 심어주셨다. 자식은 부모가 믿는 만큼 자란다고 한다. 그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 엄마가 되자 뼛속까지 절감하게 되었다. 나의 두 녀석도 공부를 잘했다. 솔직히 기회만 되면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때론 반문도 했다. ‘자기 홍보 시대에 남이 먼저 아는 법이라고? 얘기 안 하면 관심이나 보인대?’ 하지만 결국 엄마가 옳았다. 다들 어떻게 알았는지 자랑거리는 더 커져서 내게로 돌아왔다. 둘 다 순조롭게 취직하고 독립해 주어 나 역시 어떤 백만장자도 부럽지 않다. 그래도 행여 자랑으로 비칠까 항상 조심한다. 자식을 자랑하고 싶은 부모 마음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똑같을 거라는 걸 그때 벌써 아셨나 보다.


요즘 들어 더 절절히 와닿는 말씀이 하나 더 있다.

“야들아~ 세상 사는데 머가 젤로 중요할 거 같노? 다 필요 없고 하루를 살아도 마음이 편해야, 그기 사는 기라!!”

하루를 살아도 마음이 편해야 그것이 사는 것! 엄마는 그 말씀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셨다. 마음 편하지 않았던 때도 별로 없어 보였는데 왜 그렇게 되뇌었을까? 이제야 알겠다. 절대 진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돈 권력 명예가 아무리 많은들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그 마음 편치 않은 나날이 모인 그 사람의 인생은? 결국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같은, 동서양을 초월한 근본 뜻과 맞닿아 있지 않은가. 언젠가부터 생활 신념이 되었다. ‘바로 지금 마음이 편한가?’를 습관처럼 묻는다. 행동의 기준으로 삼는다. 나도 두 녀석에게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주저 없이 ‘나의 어머니’라고 답한다. 기역 자도 몰랐지만, 천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무형의 유산을 심어주고 가셨다. 오롯이 스스로 생각하고 삶에서 체득한 것들이다. 그대로 실천한 것도, 못한 것도 있다, 부모는, 특히 엄마는 자식의 제1 스승임을 보여주고 가셨다. 그걸 아는 만큼 두렵다. 내 자식들도 엄마를 가장 존경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자기 자식들에게, 너희 할머니는 이런 사람이었노라 자랑하듯 들려줄 수 있을까? 그러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남은 인생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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