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제: 취미
며칠째 한 지붕 남남이다.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한 후 남편도 나도 말이 없다.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는 쪽은 언제나 나다. 곧 주말인데 이 상태로 보내는 것은 끔찍하다.
'탈출해야 해! 혼자서라도 어디든 갔다 와야 해! '
6년 전 어느 여름날 일이다.
무작정 컴퓨터를 켰다. 문구 하나가 눈에 확 들어왔다. ‘걷기&문화 공감클럽 오케스트라’였다.
‘클래식 음악 모임인가? 걷기는 또 뭐람?’
호기심이 발동했다. 걷기와 문화생활을 함께 하는 동호회라고 한다. 서로 다른 악기들이 멋진 화음을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처럼, 성별 나이 직업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조화를 이루는 곳이라고 했다. 오호~! 멋있었다. 그 주말에 강원도 어느 길을 걸을 예정이니 회원들은 신청하라는 게시글이었다. 망설임 없이 회원가입을 하고 주말 걷기 신청도 했다. 당시 뉴스에선 일부 산악회에서 벌어지던 일탈이 보도되고 있었다.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호기심과 현실 탈출 욕구가 더 컸다. 전세 버스를 타기 위해선 서울까지 가야 한다. 7월 더운 날씨도 만만찮다. 12km를 걷는 어려움이 어떤 것인지도 몰랐다. 그저 난이도가 중하(中下)라고 하니 부딪혀 보기로 했다.
신세계였다. 사이버 세계란 말이 나온 지는 오래다. 그런데 취미 생활까지도 온라인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어떤 회원이 함께 걷고 싶은 길이 있고 그 길을 잘 안내할 수 있으면 카페 홈피에 공지를 올린다. 출발 시간과 모이는 장소, 일정 등 모든 것을 기획하고 안내한다. 그들은 그것을 ‘깃발을 든다’라고 했다. 원하는 회원은 순번과 간단한 참가 이유를 달고 당일 집합 장소에 나가기만 하면 된다. 회원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닉네임뿐이고 모든 댓글은 공개되었다. 음주 가무는 원천 봉쇄, 쓰레기 되가져 가기 등의 규칙도 맘에 들었다. 컨디션 난조로 끝까지 못 걸을 상황이 될 수도 있다. 그땐 ‘중간탈출’이라는 애교 섞인 말과 함께, 빠져나올 수 있는 지점도 명시되어 있었다.
준비 없이 참가한 첫 걷기는 기쁨과 아픔을 한꺼번에 남겼다. 기분은 날아갈 듯 상쾌했고 남편과 다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12km를 끝까지 걸었다는 자부심에 뿌듯하기도 했다. 첫 참가 후기에 열렬히 응원하는 댓글은 희열을 덤으로 주었다. 그런데 몸은 중환자가 따로 없었다. 집 안에서 걷기조차 힘들어 식사 준비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엉덩이와 다리 통증은 며칠 동안 지속되었고 움직일 때마다 ‘아이고! 아이고!’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검색해 둔 하지만 다음 걷기 공지가 뜨면 득달같이 참가 댓글을 달았다. 짧게는 6km에서 길게는 18km까지 다양한 거리를 걸었다. 걷기가 끝나면 진행자가 검색해둔 근처 맛집에서 뒤풀이하고 헤어진다. 물론 희망자에 한해서다. 돌아오는 길에 스며드는 나른한 행복! 그것은 경험자만이 알 수 있는 달콤함이었다. 처음 한동안 엄지발톱이 빠지는 수난을 겪었지만 걸으면서 흘린 땀은 놀라운 선물을 안겨 주었다. 꿈쩍 않던 아랫배가 어느 순간 조금씩 들어갔다. 분명 체중은 그대로인데 보는 사람마다 자태가 달라졌단다. 복용하고 있던 고지혈증 약을 끊어도 수치가 정상이었다. 무릎이 부실했던 나로선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는데 현실로 나타났다.
동호회에서 얻은 것은 신체적 효과만이 아니다. 사진을 전문가 수준으로 찍는 회원도 꽤 있었다. 덕분에 평생 찍은 것보다 더 많은 사진을 간직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좋은 사람들과 환히 웃고 있는 사진 속 모습은 다시 봐도 행복해 보인다. 회원들은 예술에도 관심이 많아 동호회 이름과 걸맞게 전시회와 음악회 연극을 함께 관람했다. 각 분야에 연이 닿아있는 회원이 티켓을 싸게 구매해 선착순으로 신청받았다. 그들에겐 날씨와 계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눈길을 걷고 싶어 눈밭을 찾아다니는 회원도 있었다. 더 이상 가을이 외로운 계절이 아니었고 겨울이 을씨년스럽지 않았다. 비 오는 날 걷기의 매력을 알게 된 것도 동호회를 통해서다. 촉촉이 젖은 날, 조선 왕릉을 걸으며 역사의 뒷이야기를 듣던 날의 운치는 뇌리에 깊이 박혔다. 그 후 코로나로 중지될 때까지 몇 년은 내 인생 최고의 경험을 한 기간이었다.
걷기의 매력. 좋은 점이 한둘이 아니다. 걷는 동안에는 200여 개의 뼈와 300여 개의 근육이 움직인다고 한다. 전신 운동이라는 얘기다. 체중 감량, 골밀도 향상, 통증 완화, 혈액 순환 촉진 등 셀 수 없이 많다. 비타민D는 신이 내린 특별 보너스다. 특별한 장소나 도구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다. 혼자면 생각에 잠길 수 있어 좋고 함께라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눌 수 있어 좋다. 무엇보다 걷는 동안 생각이 정리된다는 점이 가장 좋다. 일의 우선순위가 정해지고, 결론 못 내린 사안이 결정되기도 한다. 과거 행동을 되돌아보게 되고, 주위 사람에 대해 생각도 하게 된다. ‘진정 위대한 모든 생각은 걷기에서 나온다’라던 니체의 말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배우 하정우 씨도 걷기를 몹시 사랑하여 책까지 냈다. ‘걷기는 곧 인생’이라는 말이 걷기를 가장 잘 표현한 것 같다. 꼭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 세 가지가 묘하게도 인생과 닮았다.
첫째, 갈 길을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인생은 매 순간 선택으로 이루어지고 걷기 또한 어느 길로 갈지 선택에서 시작된다. 둘째, 보폭을 알고 무리해서 걷지 않아야 한다. 자기 체력에 맞춰야 한다. 돌아올 길을 염두에 두지 않아 낭패를 겪는 경우도 보았다.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하는 것과 똑같다. 셋째, 온전히 내 숨으로 걷는다. 자신의 들숨 날숨만이 도구다. 누구도 대신 쉬어줄 수 없다. 참으로 절묘한 비유다. 세 가지를 되새기며 제대로 잘 걷고 제대로 잘 사는 인생을 꾸리고 싶다.
8 자 오늘도 워킹화를 신는다. 이젠 걷지 않으면 뭔가 할 일을 안 한 것 같다. 운동이요 습관이며 취미가 되었다. 집 근처 온천 공원을 8자 형태로 크게 두 바퀴 돌면 약 1시간, 7천 보를 걷는다. 10분이 지나면 몸이 훈훈해지고 30분 뒤에는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진다. 마지막으로 130개 계단을 오르면 가쁜 숨에도 콧노래를 흥얼댄다. 시내 볼 일은 거의 걸어서 처리한다. 주차할 곳을 찾아 헤매지 않아서 좋고 자동차 보험료 할인 혜택은 보너스다. 마지막 날숨까지 Go 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