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특전사 부사관 시험에 합격하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특수전 학교에 입소한 지 오늘로 5일째
오늘 밤에도 아들 생각에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할 것 같다.
지금 시간이 밤 9시. 대한민국 육군이라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녁 점호를 받을 시간이다.
밥이나 잘 얻어먹고 있는지 , 아픈 데는 없는지 , 상황 따라 눈치껏 훈련을 잘 받고 있는지 걱정이 태산이다.
아들은 어릴 적부터 성품이 온순하고 차분하다. 부모 유전자 어디 안 간다고 했지만 외모는 나랑 판박이인데 급한 성격은 닮지를 않아 하나님 부처님께 항상 감사드리며 살고 있다.
특전사 훈련 장면
지난 11월 14일 월요일 오후 2시 스무 살 아들은 경기도 광주로 떠났다.
아홉 시 뉴스에 라임 투자 운용자 김 00 회장 밀항 첩보가 터지기 전 계획대로 였다면 나는 위도에서 여객선을 타고 아침에 일찍 휴가처리를 하고 동료들보다 하루 일찍 해상 출동을 마치고 경비정에서 하선하려고 했다.
이 뱃놈의 팔자는 항상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변덕스러운 바다 날씨만큼이나 갑작스러운 사건 사고가 치밀하게 짜 놓은 사적인 스케줄들을 인정사정없이 파괴시켜 버리곤 한다. 이 날도 그랬다.
아들을 데려다 주기위해 어렵게 육지로 나온 시간이 오전 9시 집에 도착하니 10시였다
'오후 두 시까지 입소이니 아직 시간이 여유롭구나' 철없는 생각을 하며 오랜만에 아들과 집 앞에 있는 콩나물 국밥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커피숍에서 카모마일과 아들이 좋아하는 휘핑크림을 잔뜩 얹은 쿠앤크 라떼 음료를 테이크 아웃해서 10시 30분쯤 천안 논산 고속도로를 타고 경기도 광주 특수전 학교로 출발했다.
순풍에 돛을 단 듯 차량소통이 원활하던 도로 소통상황이 남천안에서부터 무슨 갓길 공사를 한다고 4킬로 미터 구간이 정체가 시작됐다. 수많은 차들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더니 급기야 12시 30분경에는 아예 멈춰서 버렸다.
아뿔싸!! 도로의 유동적인 변수를 대비해 좀 더 일찍 3~4시간 전에는 출발을 했어야 했는데 어리석은 선택을 한것이다. 후회가 되었다. 차는 꼼짝도 안 하는데 시간은 째깍째깍 잘도 흘러 입소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입술이 바짝 타고 등에 식은땀이 베기 시작했다.
간신히 정체 구간을 통과하고 시속 140킬로 이상을 내리밟으며 특수전 학교에 도착하니 오후 1시 30분 간신히 턱걸이로 위병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빠 저 들어가요”
짧게 자른 머리와 앳된 얼굴로 아들은 나를 향해 인사하더니 바리 케이트 너머 부대 정문 속으로 사라졌다.
코로나 탓에 연병장에 모여 따로 헤어질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동안 혼자서 수없이 연습했던 행운을 빈다, 잘해라, 대한민국은 아들의 뜨거운 숨결을 원한다 등등
멋진 말들을 한마디도 못해주고 보냈다.
착하고 순한 또래보다 몸이 약한 아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맞벌이를 하며 남의 손에 아들을 맡기고 대리모가 자주 바뀌는 통에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거쳐
자라느라 아들은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다. 아들의 병명은 열성경련 ㆍ고열이 치솟으면 온몸이 뻣뻣하게 경직되면서 눈이 돌아가고 혀를 깨물어 엄마 아빠를 놀라게 했다. 새벽 베란다에 나가 열이 떨어질 때까지 옷을 벗기고 미지근한 물로 겨드랑이를 씻기고 토닥이면 그때서야 비로소 잠이 들던 아들.
아들이 노력한 흔적들
약한 몸 탓에 아들은 늘 엄마 아빠의 애간장을 태웠다. 유치원 다닐 때는 덩치 큰 또래 여자애들이랑 놀다가 팔이 빠져서 정형외과에 가서 두 번 접골을 했고 주사를 맞으며 자지러 지게 울었고
14살 중학교 다닐 때는 노래에 소질이 있어 보컬로 특기 시험을 통과하고 전북예술중학교에 입학을 했다가 모자란 부모 탓에 혼자 있는 여동생을 챙겨야 해서 1학기만 마치고 오기 싫다는 아이를 집 근처 인문계로 강제 전학을 시켰다.
학교에 적응을 못한 건지 공부가 재미가 없었는지 아들을 실업계 고등학교 기계과에 입학하고 고등학교 생활을 마쳤다. 노래를 좋아하던 고운 감성을 가진 아들에게 기계를 깎는 것이 적성에 맞을 리 없었을 텐데 눈치 없는 아비는 그때도 힘들어하는 아들에게 뭘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엄마도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작년 12월, 학교 친구들이 하나 둘 취업을 시작했을 때 아들은 딱히 진로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 방송국에서 방송된 강철부대 특전사 프로그램을 보더니 호기심이 생겼는지 특전사 시험 준비를 해보겠다고 했다.
공익을 위한 직업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에 말리고 싶었지만 자라면서 한 번도 속을 썩인 적이 없던 아들이라 올해 2월부터 시험 준비를 도와주었다.
1차 도전 때는 1분에 70개 이상을 해야 하는 상대평가 윗몸일으키기에서 너무 깐깐한 채점관을 만나 개수는 채웠으나 자세 불량으로 탈락
약 3개월 후 2차 도전 때는 어려운 체력시험까지 잘 합격을 해놓고 면접날 군부대 옆 모텔에서 늦잠이 들어 정말 어이없게 탈락을 하고 말았다.
일이 이쯤 돼자 아들을 말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사실 이 땅의 군대를 다녀온 예비역들은 알고 있다. 군대는 어려운 곳 말고 복무가 쉬운 곳에서 사이드 까다가 무사히 전역하는 게 최고라는 것을.
하지만 이미 특전사들의 멋진 모습에 흠뻑 빠진 아들에게 포기라는건없었다.
시험 준비 기간이 길어지니 전문학원 학원비부터 자유형과 평영을 마스터하기 위한 수영 강습비, 체격을 키우기 위한 닭가슴살과 영양 간식비, 용돈, 운전면허 취득비, 면접을 위한 양복을 맞추고 구두까지 사줘야 해서매달 고정적으로 제법 큰돈이 빠져나가 가계 지출도 만만치가 않았다.
시험은 자꾸 떨어지지 돈은 들어가지 시험 준비 기간이 장기화되자 내 마음이 조급해졌다.
부모가 믿어준 만큼 자식은 성장한다는데 부끄럽게도 나는 그러지 못했다. 좀 더 의연했어야 했는데 ᆢ
거실에 화초 하나도 잘 키우려면 물을 주고 햇볕을 보여주고 통풍을 시켜주고 영양제를 꽂아주고 온 정성을 기울여야 하는데 자식 농사야 오죽할까? 나란 사람 참 많이 모자라다는 반성을 많이 했다.
2차 도전 어렵게 체력 평가까지 잘 마치고 면접을 기다리며 준비했는데 어이없게도 면접 당일 늦잠을 자고 떨어지고 오더니 아들도 속이 상했는지 술이 떡이 되어서 낯선 사람에게 업혀서 집에 들어왔다. 속이 많이 상했는지 꺼이꺼이 목놓아 울었다.
꿀물을 타다 주고 "아들 대한민국에 직업은 많다. 특전사 아니어도 할거 많으니까 너무 실망하지 마라" 위로해 주었다.
드디어 10월 넷째 주, 어렵게 3수 끝에 아들은 대한민국 특전사 부사관 시험에 일단 합격을 했다.
힘든 시간들을 잘 견뎌준 아들이 한없이 멋지고 자랑스러웠다.
이제 아들을 기다리고 있을 15주간 경기도 광주에서 힘든 기초 군사훈련을 잘 받고 견뎌줘야 하사로 임관을 할 텐데 아들이 잘 해낼까? 극한의 고된 훈련들을 잘 이겨내라고 열심히 응원 중이다.
아들을 데려다 주기로 한 전날 밤바다에서 딱 3시간 자고 땅에 내려 왕복 500킬로 거리를 5시간 넘게 운전하며 아들을 학교에 입소시켰다.
부모에게 있어 자식이 뭔지 자식은 이토록 부모에게 소중하고 절절한 것일까?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줄 수 있으면 다 해주고 싶고 잘될 거라 끝없이 믿어주고 응원해 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자식인가 보다
웃으면 눈이 반달이 되는 이쁜 눈웃음 때문에 오해를 사서 훈련병이 군기 빠져서 실실 웃는다며 조교들에게 혼날 것이 제일 걱정이라던 심성 고운 내 아들.
미륵산 깊은 산속 심곡사 주지스님께 아들을 위한 인등을 하나 밝히고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수없이 발원 중이다.
“수찬아! 다치지 말고 훈련 잘 받고 몸도 마음도 튼튼해져서 대한민국의 멋진 특전사로 다시 태어나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