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해 당직을 서고 있는데 오후 2시쯤 낯선 서울 번호가 핸드폰에 떴다. 02-503-0000
뭔 스팸전화번호인가 싶어 본능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또 전화벨이 울린다.
“이보세요 저금리 은행대출은 아가씨나 받아서 쓰세요 저는 필요 없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아빠 저예요 “ 굵직한 저음의 그리운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갑자기 설 명절 특별면회가 잡혔는데 아빠와 줄 수 있느냐고
”아이고 출동을 째더라도 꼭 가야지 “ 교대 턴을 보니 다행히 입항 후 정박 기간이라 신이 났다.
집에 도착해 면회 날까지 이틀의 여유가 있어 아들이 평소 좋아하는 음식들을 딸과 상의해 리스트를 작성하고 마트를 가고 시장을 가고 집에서 찰밥을 찌고 족발을 사고 잡채를 만들고 삼겹살 소고기 치맛살 부챗살 꽃등심을 사고 채소를 씻고 다듬고 과일 3종세트 도시락까지 준비를 마치니 제법 많은 시간과 수고로움이 필요했다.
싱크대 앞에서 휘파람을 불며 채소를 씻는 나에게 딸이 한마디 한다. ” 아빠 오늘 에너지 충전 백프로네 오빠 보러 간다니 그렇게 좋은 거야? 묻는다. 암 말해 뭐 해 아들을 군대 보내놓고 석 달 가까이 얼굴을 못 봤는데 어린 네가 부모 맘을 어찌 알겠냐? ㅎㅎ
21일은 설 명절 귀경 차량 때문에 도로가 많이 밀릴 것 같아 하루 전날인 20일 금요일 오후 2시쯤 출발했다. 헐~ 시간 선택을 잘못한 것인지 귀경 차량이 점점 늘더니 경부 고속도로에 차량이 늘면서 평소 경기도 광주까지 2~3시간 걸리던 길이 무려 6시간 가까이 소요가 되었다.
정체된 차 속에 갇혀 장거리 운전을 하니 허리도 아프고 졸리기도 하고 아들을 만나러 홀로 가는 길이 산사의 도 닦는 스님의 길처럼 외롭고 쓸쓸하다.
나에게 허락된 아들면회 시간은 토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아침 일찍 부대 앞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학수고대 면회 시간이 다기오기를 기다렸다. 주차장에 나보다 먼저 오신 부모님이 딱 한 분계 셔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들과 함께
마침내 면회 시간이 되어 차에 싣고 온 음식들을 캠핑용 카트에 담아 이동을 시작했다. “세상에 이 음식들을 다 아버님이 준비해 오신 거예요?” 젊은 어머님이 놀라는 눈치다. 본인은 과일 도시락 하나 준비하고 고기는 부대 내 마트에서 사서 먹일 거라 뭐 준비도 제대로 못했다면서.
암튼 카트를 끌고 5분쯤 올라가니 부대 내 면회 대기실에 대한민국의 특전 부사관을 꿈꾸는 파릇파릇한 20대 아들들이 생기 가득한 얼굴로 신이 나서 각자 가족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꿈에 그리던 아들 얼굴을 보니 콧날이 시큰해지고 가슴이 벅찼다. 반가움에 힘껏 껴안은 아들은 집에 있을 때보다 규칙적인 생활 덕분에 어깨도 더 넓어지고 얼굴 가득히 피어났던 여드름 꽃도 없어져 예상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면회 오기 전에 민턴클럽에 동갑내기 친구가 4년 전에 먼저 특전사 부사관을 보냈었고 지금은 전역을 했는데 첫 면회 때 가서 얼굴도 너무 야위었고 새카매서 가슴이 아파서 아들 보면서 한참을 울었다고 하길래 걱정을 많이 하고 부대 면회를 갔었다.
아들과 둘이 앉아 준비해 온 음식을 풀고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코로나 탓에 기초 군사과정 훈련 기간이라 그런지 외부에서 음식도 배달을 시킬 수 없고 부대 내 PX를 이용하지 못하게 해서 찰밥과 치킨을 너무도 맛있게 먹는 아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짠했다.
세월이 가도 군대는 군대구나 싶고.
아픈 데는 없는지 잠은 잘 자는지 훈련은 잘 받았는지 내무실에 힘들게 하는 친구는 없는지 공수 낙하 훈련은 무섭지 않았는지.....
아빠표 2배속 속사표 질문 렙을 퍼붓기 시작했다.
성격 차분한 아들이 “아빠 하나씩 물어봐야지 대답을 하지 그렇게 물으면 답을 못하지”
맞네. 마음이 바빠 앞 뒤 없이 질문을 퍼부었네.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픽 웃음이 터졌다.
부대 내 모든 생활이 순탄하고 훈련은 받을만하고 잘 적응하고 있단다. 입소 첫 주에 코로나가 걸려 힘들었으며 헬기를 타고 올라가 공중 낙하 훈련 때는 무서웠는데 앞에 친구들이 뛰어내리니까 아무 생각 없이 뛰어내렸다고 한다.
높은 곳에서 낙하를 하려니 춥기도 하고 입소 후에 가장 힘든 훈련이었다고 말한다.
또 같이 입대한 동기들이 코로나와 독감으로 20여 명 넘게 강제 귀가를 당해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돌이켜 보니 사춘기기 지나고 15살 때부터 아들과는 목욕탕을 같이 가지 못했다.
그 나이가 되면 그런 걸까? 신체에 변화가 시작되고 2차 성징이 나타나고 끝나는 시기라 그런지 아들은 나에게 몸 보여 주는 것을 싫어했다.
서로 바빠 차분히 대화를 나눌 시간도 많이 없었고 보통의 아빠와 아들이 그러하듯 딱히 친밀함을 표현하지도 못하는 사이로 몇 년을 보냈었다.
부대 내 매점에서 커피를 한 잔 사서 정말 오랜만에 군대 입대 후 한 뼘쯤은 더 성장한 아들과 마주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따뜻한 햇살을 받고 벤치에 앉아 있으니 벅찬 행복이 밀려왔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반 친구들은 하나 둘 취업을 나가는데 딱히 목표도 정하지 못한 채 집에서 게임을 하며 몇 달을 놀던 그때아들에게 말했다.
“회사 가서 쇠 깎는 단순 노동 보다 뭔가 보람되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
현재의 특전사 부사관 지원이 과연 잘한 선택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삶은 어떠한 경우에도 100 퍼센트 확실한 선택은 거의 없는 거니까. 다만 아들이 잘 적응하고 있으니 다행 스러 울 수밖에.
부대 내 PX에서 누나에게 선물할 화장품 몇 개와 아들에게 필요한 면도기 몇 개를 사서 주고 성품 좋은 따뜻한 조교님이 도움으로 멋진 조형물 앞에서 기념사진을 한 장 찍고 오후 3시 맨 마지막까지 면회장에 남아 조교의 통솔하에 생활실로 복귀하는 아들을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역시 귀성 차량이 늘어 4시간 넘게 걸렸다.
녹록지 않은 길을 선택해서 아직까지 잘 버텨준 아들이 고맙고 어디 다친 곳 없이 건강하게 생활하게 보우해 주신 여러 신들께 머리숙여 감사드렸다.
해가 바뀌고 새해가 시작된 지도 벌써 두 달이 훌쩍 지나가고 있다.
따뜻한 3월의 봄날 아들은 대한민국 특전사 부사관으로 임관한다.
얼마 남지 않은 그날 아들은 또 훌쩍 성장한 모습으로 내 곁에 서 있을 것 같다.
“사랑하는 아들! 임관 때까지 더 노력하고 집중해서 시험 평가 잘 받아서 네가 가고 싶어 하는 국제평화지원단 꼭 합격하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