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불 해송도 멋져요
지구 상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즉 화석 나무를 꼽으라면 단연 메타세쿼이아 나무를 꼽는 이가 많다. 지금의 메타세쿼이아는 중국 쓰촨 성과 후베이성이 원산지로 알려져 있지만 포항에서도 화석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고대 한반도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영덕의 메타세쿼이아 숲의 존재를 안건 정말 우연이었다. 모 포털 사이트에 사진 한 장과 간단한 방문 후기가 올라왔는데, 한마디로 그 사진 속 광경을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띠였다. 특히 활엽·침엽 교목이지만 잎 모양만 보면 황금빛 침엽수로 보이는 잎이 떨어지는 모습은 마치 황금비가 내리듯 가을이면 더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가을이 깊어진 10월 중순, 나는 어딘가에 끌리듯 영덕으로 차를 몰았다. 시원스레 뚫린 7번 국도를 따라 달려가는 길에는 휘파람이 절로 났다. 영해 초입에서 영양 방면으로 방향을 잡았다.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대로 지방도에서 우측으로 갈라진 길을 택했다. 아마도 지난 봄철이나 여름철에 이 길의 표정은 달랐으리라.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건 너른 들판의 허수아비와 길가의 고라니였다. 고라니는 내 눈과 마주치자 부끄러움을 탔는지 녀석은 미처 암내마저 거두지 못하고 인근 숲으로 사라진다. 메타세쿼이아 숲으로 가는 길, 주변에 물든 단풍은 조금 관록이 붙었다는 화가가 그린 그림보다 더 화려하다.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차에서 내려 공기를 마음껏 흡입한다. 폐를 치료해야 하는 환자는 아니지만 도시의 오염된 공기만 맛 보여준 내 무성의가 미안해 지친 폐에게 그리고 더 주름이 잡힌 뇌에게 공기 비타민을 선사한다. 목적지를 잊은 채 나는 암스트롱이 달 표면을 걷듯 조심스럽게 걷어 본다.
더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초입부터 금빛 세상이다. 낙엽·침엽 교목이라 떨어진 잎은 마치 황금빛 융단을 깔아 놓은 듯했다.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황금 이불을 갈고 누워 쳐다본 하늘엔 높은 구름이 어디론가 바쁘게 흘러갔다. 나의 지난 몇 년간의 세월도 함께 바쁘게 스쳐 지나갔다.
벌써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선의(善意)인 줄 알고 고맙게 받아들였던 금전거래가 나도 모르게 사기꾼으로 변해 있었다.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친구처럼, 친동기처럼 지냈던 동료들이 뒤에서 비수를 꽂은 사실도 알았다.
1년여 동안 진행된 재판에서는 변호사비가 없어 내가 직접 항소하고 상고했다. 결국 교도소에 가는 일은 없었지만 지칠 대로 지친 1년이었다.
그로 인한 스트레스와 분노, 배신감은 당장 건강 이상으로 다가왔다. 곧바로 이어진 신부전으로 7년째 혈액투석치료가 이어지고 있다.
생채기 난 내 상처에다 소금을 뿌린, 내 생애에 없어서도 좋을, 잊어버리고 싶은 그런 10년이었다.
머리를 흔들어 나쁜 기억을 떨치려는 순간, 30여 m는 족히 되어 보이는
메타세쿼이아 나무 한그루 한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하나같이 쭉쭉 뻗은 모습이다. 어느 녀석 할 것 없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쭉 뻗었다. 마치 앞만 보고 달린 내 젊은 날의 삶처럼, 하늘을 향해 그침 없이 뻗어나가기만 한 듯 보였다.
숲에 들어온 지 30여분이 흘렀다. 묵직했던 머리는 어느새 맑아지고 새소리, 바람소리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온몸의 감각을 열어 숲이 주는 기운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해먹에 누워 잠시 눈을 붙인 나는 숲 속 산책로와 최근 새로 생긴 전망대를 둘러보고 3시간여 만에 숲을 힐긋힐긋 돌아보며 인근 인량마을로 향했다.
8 종가가 모여 있는 전통마을, 인량마을은 내가 8년여 전부터 알고 지내던 누나뻘 되는 지인이 있는 곳이다. 여인네의 몸으로 도회지 생활을 접고 이곳에 정착했다. 마을 부녀자들과 협동조합을 만들어 전통체험과 한옥스테이를 주도하고 있다. 한마디로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이 마을을 전국에 소개하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때마침 서울과 인량마을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는 갈암종택의 종부님이 오셨다는 소식에 갈암종택으로 향했다. 종가음식의 명인이신 종부님이 차려주신 저녁은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만큼의 진수성찬이요, 일류 음식이었다.
그날 저녁, 지인과 나는 찻잔을 앞에 놓고 오늘 둘러본 메타세쿼이아 숲과 인량마을을 관광 상품화할 방안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한결 가벼워진 몸, 그리고 확 풀린 스트레스 때문일까 새벽 일찍 눈이 떠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계획한 한 가지 일이 아직 남아 있어서였다. 눈을 뜨자마자 쪽지 한 장을 지인에게 남기고 나는 고래불해수욕장으로 차를 몰았다. 15분 거리였다.
일출 직전에 고래불해수욕장을 찾은 것은 해돋이를 보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내가 원하던 것은 이 해수욕장 20리 길에 들어선 곰솔 밭 때문이다. 잘 갖춰진 목재 데크길과 마침 피어오르는 해무는 말 그대로 무릉도원, 그 자체였다. 30여분 산책길에는 역시 해풍을 견디며 끈질긴 생명력을 잉태한 소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의 내음을 마음껏 맡을 수 있었다.
마음의 치유를 하고 돌아가는 길은 몸도 마음도 가뿐했다. 가족단위 여행객들이 즐거워하는 모습도 눈에 훤히 비쳤다.
“그래 다음엔 가족들과 함께 오는 거야. 여행을 하다 더 지치는 그런 여행이 아니라 진정한 휴식, 진정한 힐링이 되도록 친구들과 지인들에게도 적극 추천할 거야...”
나는 어느새 숲이 주는 치유의 효능을 알리는 전도사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