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잘 물든 단풍이면 좋겠네
두 번째 서른 즈음에
남자들에게 있어 서른 살과 쉰 살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서른이 되기 전에는 학업을 마쳐야 하고 군대를 다녀와야 하고 결혼을 해야 하는 그야말로 한해 한 해가 대사건(?)의 연속이다. 서른 살은 한자어로 입지(立志)로, 말 그대로 뜻을 세우는 시기이다. 20대에는 실수를 연발하고 매사에 미숙해 사고를 치더라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그래 젊으니까”라며 용서와 이해를 구할 수 있지만 서른 살이 되면 그 의미는 달라진다.
나의 서른 살은 어땠을 까?
도리 켜 보면 세상이 좁은 듯 전국을 무대로 마치 호랑이가 자신의 영역을 순회하듯 뛰어다녔다. 씨름선수 출신의 근장 한 내 승용차 기사가 3개월을 못 버틸 정도였으니 얼마나 강행군을 하고 다녔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나는 20대에 아주 색다른 이력을 가지고 있다.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지방의 모 언론사에 입사했으나 기자라고 새긴 명함 1통을 다 쓰기 전에 사표를 냈다. 당시 수습기자 시절 받은 월급이 60만 원이었는데 하숙비 내고 옷 사 입고 친구, 동료들과 어울리다 보면 항상 통장 잔고는 0원이었다. 그런데 기자로 취재원인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다 보면 성공한 기업인의 경우 몇 백억 원의 재산가들이 많고 출입처의 예산 규모는 최소한 몇 천억 원 단위였다. 내 통장잔고와는 비교도 할 수 없어 느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업가가 되기로 작정하고 사표를 냈다.
재벌 2세도 아니고 ‘은수저’를 물려받은 것도 아니고 내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직능 주의’ 인사시스템을 가진 미국계 회사 ‘한국브리태니커 회사’에 입사했다. 이 회사는 한마디로 영업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로 성과를 이룬 만큼 돈도 주고 승진도 시키는 그런 회사였다. 사업을 하려면 영업부터 배워야 한다는 주위의 조언을 받아들인 결정이었다.
생전 처음 접해보는 방문판매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어려운 문제는 바로 나 자신의 자존심과 싸우는 일이요, 주위로부터 받는 따가운 시선을 이겨내는 일이었다.
‘대학까지 나온 놈이, 멀쩡한 기자생활을 그만두고 책장사를 한다’는 주위의 시선은 나를 더욱 단련시켰다. 그래서 나는 ‘미친놈’이라는 말을 들어가면서 가망고객을 발굴하고 만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대영 백과사전)을 판매했다. 주위에서 멸시할 때마다, 매몰찬 고객을 만날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을 더욱 단련시켰다.
한 번은 치과 의사를 만났는데 약속시간을 1시간가량 어기며 늦게 나타났다. 그런데 ‘똥 뀐 놈이 화를 낸다 ‘ ‘고 그 치과의사는 사과는커녕 잡상인 취급하며 일관되게 거만한 태도로 나를 대했다. 그래서 나는 ’ 먼저 사과부터 하세요 ‘ 라며 맞섰다. 그러자 그는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으며 ’ 내가 감히 누군 줄 알고 사과를 하라고 하느냐 ‘ 며 00 기관의 자문위원이라며 유력인사들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큰 소리를 쳤다.
결국은 옥신각신 언쟁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 그는 ‘책장사 주제에 건방지다’라는 말을 뱉었다. 나는 참다 참다못해 그 자리에서 같이 언성을 높였다.
“그렇습니다. 나는 150만 원짜리 책을 파는 사람이지만 원장님은 썩은 이를 빼주고 천 원 받는 사람이 아닙니까?” 라며 맞받아치며 아수라장이 됐다.
싸운 뒤에 친해진다고 물론 그 뒤 그 원장님과는 지금까지도 교류하며 서로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다.
입사 첫 달부터 나는 회사 내 ‘세일즈 스타 10인’에 선정됐다. 그 후 나는 입사 6개월 에 중간관리자로 승진해 대구에서 대전으로, 또 1년여 만에 다시 단위 부서 책임자로 승진해 서울에 입성했다. 3년여 만에는 조그만 규모지만 사업을 할 수 있을 만큼 경험도 쌓았고 자금도 마련했다. 그리고 뛰어든 것이 ‘월간 세일즈’라는 월간 잡지를 발행하는 일이었다.
전공도 살리고 영업 경험도 살리자는 그런 취지였다.
그런데 기회는 엉뚱한 곳에서 찾아왔다. 대전에서 중간관리자로 근무할 당시 나를 눈여겨보았던 모 도자기 회사의 사장님이 나를 스카우트하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그 회사는 도자기업계 랭킹 3,4위를 달리던 중견기업이었다. 유통 전문 계열사를 신설할 계획인데 ‘기획실장’ 직을 제안받은 것이었다. 직함만 기획실장이지 실제는 사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가 바로 서른 살이었다. 지금 돌아보아도 세상에 두려울 것이라고는 없는 나이였다.
나는 직접 회사의 상호를 짓고 조직을 만들어 갔다. 대전을 필두로 서울과 대구 전주, 청주로 조직을 확대하고 책임자를 선정해 매출을 늘려갔다. 덩달아 나의 수입도 월급과 인센티브로 인해 천만 원 단위로 늘어났다.
누가 시샘이라도 한 것일까. 회사 설립 2년 만에 사장은 애초 약속과는 달리 독단으로 일처리 하기 시작했고, 조직을 직접 장악하려는 속셈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는 꼬박 열흘 동안 고민하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라는 말을 남기고 회사를 떠났다. 물론 그 뒤 나는 언론인으로 다시 돌아와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몸담고 있다.
내 나이 쉰 살이 되어 새롭게 저지른 일은 글을 쓰는 일이다. 물론 평생 기자로서 글을 써 왔지만 그 글은 팩트에 기반을 둔 기사문이 주류를 이루었고 늘 마음 한 편에 자리 잡고 있는 넓디넓은 허구의 세계를 유영하고픈 꿈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쉰 살이 되던 해 문을 두드린 것이 수필이요, 소설인 문학이다.
저녁노을이 지는 창가에 앉아서는 하루를 돌아보고 지난 세월을 돌아보는 수필을 쓴다. 그리고 깜깜한 밤이 되면 유영하는 별처럼 나의 상상력도 몇 겁의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유영을 한다. 가보지 못한 길을 가보고, 젊은 시절 놓쳐버린 기차도 다시 타 본다. 내가 떠나보냈던, 나를 떠났던 헤어진 사람과의 반 마디 짧은 인연도 새롭게 대 본다.
수 십 가지 직업도 가져 본다. 독재자가 되어 보기도 하고 수전노가 되어 보기도 하고 첩보원이 되거나 카사노바가 되기도 한다. 이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가 말이다.
혹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100세 시대에 태어나서 25세까지를 봄, 50세까지를 여름, 75세까지를 가을, 100세까지를 겨울이라고 했다. 그러면 나는 분명 가을의 초입에 들어섰다.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만추(晩秋)는 아니지만 사방의 나뭇잎도 내 마음도, 울긋불긋 물들기 시작하는 시절이다. 법륜스님은 ‘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아름답다’ 했으니 나 홀로 아름다운 꽃보다, 주위 사람들과 어울려야 비로소 완성되는 잘 물든 단풍이 되고 싶은 마음, 욕심일까?
한때, ‘우리 같이 살래요’라는 모 방송사의 연속극이 한창 인기를 누린 적이 있다. 이 연속극은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늦게 만나 새롭게 자신만의 사랑을 추구하는 초노의 남녀 간의 사랑을 그렸다.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더욱 서로를 갈구하고, 자식들로 인해 자신의 삶을 희생해 온 우리 시대 기성세대들의 삶을 되짚어보게 하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장면 하나하나가 ‘나의 스무 살과 서른 살’ 그리고 지금의 나를 되돌아보게 하지만 분명 나와는 온도 차이는 있다.
이제 내 나이 쉰 살을 넘긴지도 몇 해가 지났고 건강도 잃어 비실거리고 있지만 나는 오늘도 실현 가능성은 없지만 나의 ‘두 번째 서른 살’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이번에 맞는 두 번째 서른 살에는 잘 물든 단풍처럼, 섞이고 짓 이기며 나름의 아름 다움으로 표현되는 데칼코마니처럼, 혼자가 아닌 여럿이고 싶다.
혼자 웃으면 미쳤다고 하겠지만 여럿이 웃으면 단풍처럼 아름다운 에너지가 될 테니까.
과욕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