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나는 카메오

중매를 잘하면 양복이 한벌?

by 연오랑


가을이 깊어 간다. 봄에는 누구나 똑같이 푸른색을 띠던 나무 잎들이 가을이 되자 제각각 개성을 뽐내기라도 하듯 울긋불긋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뜨거운 라테 커피가 따뜻한 커피로 변하길 기다리는 순간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경엽 씨, 이번 주말에 시간 좀 비워 놔, 2시간이면 돼”

대학 동창으로부터의 전화다. 가끔씩 전화 통화를 하고 얼굴은 1년에 2,3번 정도 보는 그런 여자 대학 동창생이다. 쉰이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은, 요즘 말로 하면 골드미스다. 모 공기업의 부장으로 재직 중이어서 추정컨대 연봉이 1억이 넘는 잘 나가는 친구다. 그런 친구가 내게 전화를 해 시간을 비워도라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바로 남자 친구 대역이 필요한 때문이다. 이 친구와의 연극(?)은 대학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시절 30여 명의 우리 과 학생들 중에는 여학생이 10여 명 있었다. 게 중에는 집안 형편이 부유한 부잣집 딸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유독 한 사람의 여학생은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다. 매일 같은 옻을 입고 전공 책마저 학교 앞 복사 집에서 만든 해적판 책을 끼고 다녔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인지 또래 친구들 모두 하는 그 흔한 연애도 한번 못해보고 여기저기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꽃 같은 청춘이 다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래도 가장 자주 그 여학생을 볼 수 있는 곳이 학교 도서관이었다.

그날도 화창한 가을날의 주말이었다. 학교 도서관 내 고시반 “청곡제‘에서 생활하던 나는 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도서관 밖 벤치로 나갔다. 그곳에서 평소 같은 과 여학생이었지만 별로 친분이 없던 그 여학생과 마주쳤다. 그 여학생은 그날따라 평소 매번 같은 청바지 차림에서 벗어나 근사한 정장 차림의 복장에다 머리도 방금 미장원에 갔다 왔는지 파마약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

“경엽 씨 오늘 오후에 시간 좀 있으세요” 느닷없는 질문에 내가 당황해 하자 재빠르게 다음 말을 이어갔다.

‘오늘 아주 곤란한 일이 생길 것 같아 부탁을 좀 하려고요 “

그 여학생의 부탁이란 이랬다. 대학 졸업반이 되자 부모님이 선을 보라고 성화라고 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데다 동생들마저 2명이나 더 있어 입이라도 덜어보자는 심상으로 빨리 시집을 보내려 애를 쓴다는 것이다. 그날도 내키지 않은 선을 보라며 성화여서 하는 수 없이 거짓말을 하며 그 자리를 모면해 볼 요령으로 내게 부탁을 해 온 것이었다. 즉 내게 한 두어 시간만 사귀는 남자 친구인척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벌써 선을 보고... 결혼할 마음은 더욱 없는데...”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나는 워낙에 심각한 표정으로 통사정을 해 마지못해 승낙을 했다. 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로 가는 동안 그 여학생이 나를 선택한 이유가 밝혀졌다. 이 시간이면 항상 도서관에 있으니 허탕 칠일이 없고 그리고 졸업 후 곧바로 군대에 간다는 사실이 나를 선택한 동기였다. 더구나 약속 장소에 나가도 그 여학생의 부모님과는 얼굴을 부딪칠 염려가 없어 내게도 씻지 못할 부담감을 주지는 않는 일이었다.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 있기만 해도 되는 그런 복잡하지만 단순한 일이었다.

연극으로 치면 지나가는 사람 1 정도, 바로 카메오 역할이었다.

그녀의 잘 짜인 사 나리오에서 나는 인사시킬 정도의 사이는 아직 아니고 사귀는 남자 친구 정도로만 넌지시 알려주면 되는 그런 자리였다. 또 후에 물으면 ‘군대 갔다’고 둘러댈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을 벌기에도 충분한 조건이 된 것이었다. 그 친구는 그렇게 위기를 넘겼다.

졸업반이 되자 취업을 해야 하는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나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고시 3 수생에게 4학년 2학기는 정말 오래간만에 찾아오는 꿀맛 같은 휴식시간이었다. 졸업식 후 곧바로 군대 입대를 해야 하는 경우여서 대학 3년 반 동안 갖지 못했던 여유를 모두 누리게 됐다. 같은 처지의 친구 몇몇과 여행도 다니고 등산도 다녔다. 이때 우리나라 주요 산의 정상은 모두 등정했고 이름난 유원지나 명소는 다 다녔다. 그때 그 여학생도 2,3군데 우리 일행과 함께 여행에 따라나서곤 했다.

그로부터 20년 후 그 여학생이 어느 날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도시의 책임자가 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혼자였다. 간간히 전화가 와 점심을 같이하기도 하고 사무실 근처에 들릴 일이 있으면 차도 한 잔 하고 가곤 했다. 누가 보아도 속 편한 그런 골드 미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의 머릿속에는 애당초 결혼 같은 것은 염두에도 없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내가 선보였던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시고 최근에는 대신 이모가 성화라고 했다.

“이제는 포기할 나이도 됐는데...”

이모는 나이가 들수록 옆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며 최근 들어 또다시 선을 보라며 야단이라고 했다.

이날도 모 학교 교감선생님과 선을 보라고 야단이란다. 그래서 또다시 30여 년 만에 내게 대역을 부탁한 것이다. 이번에도 대면을 할 필요는 없었다. 멀찌감치 떨러 져 앉아 존재 사실만 보여주면 되는 그런 대역 연기였다.

“아마 이번이 마지막 일거야”라며 그녀는 겸연쩍게 웃었다.

그녀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를 골드미스로 만든 원인은 무엇일까? 아마 가난이 아니었을까 싶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집안이 풍비박산 나지 않았다면, 동생들을 공부시켜야 한다는 짐이 없었다면, 남들과 같이 즐거운 대학생활을 했을 것이고 또 좋은 사람을 제때 만나 연애도, 결혼도 했을 것을...

다음에 만나면 이번에는 친한 친구인 내가 카메오가 아닌 중매쟁이로 나서 볼 참이다.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여자가 누릴 수 있는 사소한 행복을 느껴볼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다.

이 눈부신 가을날, 머리가 희끗희끗한 옛 친구가 아닌 얼굴만 쳐다봐도 웃음이 절로 나는 귀한 사람에게 전화하도록 해 주고 싶다.

그리고 잘되면 대역이나 카메오가 아닌, 정말 남은 평생 옆 지기 역할을 잘할 남자를 만들어 주고 싶다.

그 젊은 날의 고생을 보상받을 수 있을 만큼 멋진 남자로...


* 이 글은 2018년 10월에 쓴 작품으로 문학광장 73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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